선조들의 부처님 오신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월초파일은 지위고하를 뛰어넘어 누구나 즐기는 ‘범국민 축제’였다. 삽화=손정은 작가.

종로 거리 연등 환하게 밝혀 
의금부 야간 통행금지 ‘해제’
어린이 신나게 뛰어 노는 날
고려, 조선 문인 초파일 노래

“부처님 생신은 사월 초파일이네. 도성 사람들은 천백 등을 달아 발원하네” 조선 전기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사가시집(四佳詩集)>에 실린 시(詩)다. 억불숭유의 시대로 알려진 조선시대지만, 당시 한양에 사는 백성들은 사월초파일 수많은 등을 밝히고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했다. 이밖에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인과 사대부들은 초파일 풍광(風光)과 그날을 맞이한 마음을 담은 작품을 다수 남겼다. 마치 동영상과 사진을 보듯 생생하게 표현한 선조들의 부처님오신날 모습을 살펴본다.

초파일은 잔치였다. 지금처럼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양반이나 상인 누구나 마음 편히 즐기는 축제였다. 서거정은 “배꽃처럼 밝은 달밤에 취해서 돌아간다”면서 “사람의 헛된 생각이여 어찌 꿈엔들 지니겠는가”라고 초파일을 맞이한 심경을 노래했다. 부처님오신날 지인들과 즐겁게 술 한 잔하고 늦은 밤 달을 벗삼아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헛된 생각을 꿈에 지녀야 겠느냐”며 탈속(脫俗)을 발원했다.

조선 전기 도성 한양의 초파일 풍경은 서거정이 남긴 ‘한도십영(漢都十詠)’이란 글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 글의 ‘종가관등(鍾街觀燈)’이란 단락이 그것이다. ‘종가’는 지금의 서울 종로 거리로, 당시에도 한양의 중심이었다. ‘관등’은 부처님 탄신일에 불을 밝혀 봉축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종가관등’이란 초파일을 맞아 종로 거리에 연등을 환히 밝힌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안성중백만가(長安城中百萬家), 일야연등명사하(一夜燃燈明似霞), 삼천세계산호수(三千世界珊瑚樹), 이십사교부용화(二十四橋芙蓉花), 동가서시백여주(東街西市白如晝), 아동경주질어유(兒童驚走疾於狖), 성두란간란불수(星斗闌干爛不收), 황금루전최효고(黃金樓前催曉考)” ‘

장안성’은 서울을 상징하는 것으로 조선의 수도 한양이다. ‘이십사교’는 중국 양주 강도현(江都縣)에 있던 스물네 개의 다리로 번화한 도성의 거리를 나타낸다. 이 시를 통해 조선 전기 부처님오신날 한양의 대부분 집들이 밤새도록 연등을 환하게 켜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 경치가 마치 산호수 빛과 같았고, 종로 중심은 연꽃이 핀 듯 했다. 밤은 대낮처럼 환했고, 아이들은 마치 원숭이들처럼 신나게 놀았다. 연등은 북두칠성이 기울 때까지 밤새 불을 밝혔다.

사월초파일이면 집집마다 거리마다 등을 내 거는 ‘간등(干燈)’의 풍속이 있었다. 사진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조계사 앞에 설치한 ‘간등’. 신재호 기자

조선 전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에도 초파일 당일 한양을 환하게 밝힌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초파일 등불이 수많은 집을 비추니, 만겁 이래의 인연은 석가모니를 위한 것이다.” “등광팔일조천가(燈光八日照千家) 만겁래연위석가(萬劫來緣爲釋伽)”

부처님오신날 한양의 축제 분위기는 그 후에도 이어졌다. 조선 중기 문인 권필(權韠, 1545~1612)의 <석주집(石洲集)>이 그 증거이다. 그는 ‘관등행(觀燈行)’이란 칠언고시(七言古詩)에서 “한양의 부자들은 천하의 영웅”이라면서 “등을 밝히고 잔치를 벌여 가르침을 전한다”고 초파일 풍광을 노래했다.

또한 “은촛불이 영롱하고, 봉황 다섯 마리가 용 아홉이 꿈틀대는 것 같다”면서 “이날은 ‘금오(金吾)’가 밤 통행을 막지 않아, 풍악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고 전했다. ‘금오’는 임금의 특명을 받아 치안을 담당한 의금부(義禁府)를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경찰청으로, 이날 만큼은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밤새도록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했던 것이다.

또한 초파일을 축하하는 각종 공연도 밤새 열렸으니, 그야말로 ‘범국민 축제’ 였던 것이다. 그 어느 것에도 구속받기 싫어하며 벼슬에 나서지 않은 권필은 이 시의 말미에서 “내일이 초파일인지 알지 못한다”면서 “벗들과 모여 술 한말(一斗)을 마셔야지”라고 한탄한다. 구속받기 싫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친 ‘자유인 권필’의 마음이 엿보인다.

한양만 화려한 사월초파일을 보낸 것은 아니다. 조선 말기 이남규(李南珪, 1855~1907)의 시문집인 <수당집(修堂集)>에 실린 ‘함산관(咸山館) 관등(觀燈)’이란 시에는 함경도 함흥의 부처님오신날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그는 “사월초파일은 관불(灌佛)하는 날”이라면서 “집집마다 촛불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겹겹이 비단등으로 수놓았다”고 그렸다.

저자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은 풍광을 이남규는 이렇게 노래했다. “송이송이 나무 마다 꽃송이가 피었네. 하늘 가득 붉은 별이 점점이 반짝이네. 세로 가로 이어지니 몇십리이냐.” “타타춘림철신파(朶朶春林綴新葩) 점점청민배열숙(點點晴旻排列宿) 종횡련락십수리(縱橫聯絡十數里)”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권근(權近, 1352~1409)은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에서 경기도 장단(長湍)의 초파일을 생생하게 그렸다. 장단은 지금의 파주시와 연천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개성, 한양과 멀지 않다.

권근은 “밭일 하는 할아버지가 봄 농사를 피해 외로운 등불을 높이 걸고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면서 “이날, 농부들은 봄 농사를 멈추고 부처님 앞에서 소원을 빈다”고 전했다. 하지만 시골이라 ‘봉성(鳳城)’처럼 환한 등불은 볼 수 없고 달빛이 대신한다고 아쉬워했다. 봉성의 경기도 파주의 옛 지명이다. 권근이 초파일을 맞이한 장단은 봉성보다 더 시골이었던 것이다. “적막한 강촌이라 등불은 찾을 수 없고, 중천에는 달빛만 환하게 밝구나” “강촌적막무등화(江村寂寞無燈化) 지유중천월색명(只有中天月色明)”

사월초파일’ 소재의 시가 들어있는 서거정의 <사가시집> 제46권. 출처=한국고전번역원

고려말 문신 이종학(李種學,1361~1392)은 <인재유고(麟齋遺稿)>에 관동, 즉 지금의 강릉 등 영서(嶺西) 지역의 사월초파일 풍광을 담았다. 그는 “초파일을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긴다. 천지가 이날 가장 영험하게 열렸다”고 했다. 이어 “등불이 대낮처럼 환하고, 불꽃은 마치 유성처럼 흩어진다 … 야심한 밤에 계를 설하는 것을 들으니, 한 치 마음에도 잠깐이지만 깨우침이 있네”라고 노래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의 ‘송파수작(松坡酬酢)’이란 작품에서 “인생은 산에 노닐 겨를이 몹시도 적다(人生苦少游山暇)”면서 “초파일에 불공 드릴 인연도 잇질 못하네(未續明粢八日緣)”라며 아쉬워했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비가 오는 초파일 ‘관등(觀燈)’에 우산 쓰고 참여하는 것을 염려했다. <목은집(牧隱集)>에서 그는 어느 해 초파일 작은비가 장비처럼 거세지자 목은은 “노년에야 소년 시절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고인(古人)의 밤놀이 하던 걸 누가 능히 배우냐”고 했다. 여기서 고인은 부처님을 상징한다.

이밖에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인들은 초파일 풍광을 그린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는 물론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사월 초파일을 노래한 문인들의 작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은 이채롭다. 

참고문헌 = <사가시집(四佳詩集)>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목은집(牧隱集)> <추강집(秋江集)> <수당집(修堂集)> <석주집(石洲集)> <인재유고(麟齋遺稿)>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