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남한과 북한 간에 온화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서로를 무시하지 않고, 상대방을 중시한 결과다. 일단 경제협력부터 활발히 이루어져 남한의 기술과 자본, 그리고 북한의 자원과 인력이 결합한다면, 쌍방 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밝아진 혜능이 5조 홍인화상을 뵙고 인사하니, 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에게 예배하며, 지금 나에게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이에 혜능이 답했다.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일부러 멀리 와서 화상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5조 대사가 말했다. “그대는 영남사람이요, 또한 오랑캐 출신이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혜능이 답했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큰스님과 같지 않으나, 불성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북이 따로 없다. 남쪽에 사는 사람이나 북쪽에 사는 사람이나 본성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이제는 남과 북이 만나듯이, 초기불교와 선불교도 만나야 한다. 초기불교의 몸과 마음 관찰, 그리고 선불교의 견성공부가 함께 만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몸과 마음 관찰하는 것을 중시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해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통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아(無我)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성품은 존재자체가 무시(無視)된다.

선불교에서는 성품을 중시한다. 때로는 불성, 혹은 공성(空性), 혹은 자성, 혹은 대아(大我)라고 부르지만 근본은 다르지 않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다르지 않으며, 모든 생명이 한 고향 출신인 것이다. 선가에서는 이 점을 중시하여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을 찾는 견성공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은 무시된다.

참 나는 무아요, 무아는 대아다. 부처님에게는 세 가지 몸이 있다. 법신불은 성품자리요, 보신불은 마음으로 나투신 부처님, 화신불은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이다. 이 삼불(三佛)은 서로를 무시하지 않으며, 원융무애하다. 이것이 화엄의 화쟁(和諍)이다.

[불교신문3393호/2018년5월16일자] 

월호스님 논설위원·행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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