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욕을 안 하려고 애쓴다. ‘훈습’과 ‘삼업’이란 말을 알면서부터 더더욱 조심한다. 그런데 이런 다짐이 물거품이 될 때가 있다. 성정이 경박해서인지 운전을 하다보면 욕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옆자리에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내가 왜 이럴까 자책도 한다. 

욕은 감정의 극단적 표현이다. 극단이니 대화와 타협의 여지도 없애버린다. 듣는 입장에선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가 않다. 설령 앞에선 위력에 눌려 수긍하는 척 할지라도 속으론 칼을 간다. 면종복배(面從腹背)가 따로 없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보면 “버섯이 아무리 곱다 한들 화분에 떠서 기르지 않듯이 욕설이 그 속에 아무리 뛰어난 예능을 담고 있다 한들 그것은 기실 응달의 산물이며 불행의 언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응달의 산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욕을 입에 달고 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욕할 상황이 아닌데도 악다구니를 퍼부었는데 꼭 남한테 일부러 들으라는 식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럴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신산한 삶을 살아온 그는 만만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의 자기방어라고나 할까. 욕이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 같은 거였다. 

요즘 한 대기업 회장의 부인과 딸이 연일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직원들 몸을 밀치고 삿대질하고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골인 분들이 왜 저럴까. 저들도 가시가 필요하나? 아니다. 돈 많고 배경이 좋으니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히고 이게 언행을 거침없게 만든다. 꺼릴 게 없으니 기세가 더더욱 오르고, 저 아래 개똥밭에서 먹고살겠다고 인욕, 그러고 보니 가난은 얼마나 큰 수행법인가. 근데 이 비자발적 수행법이 달갑지는 않다. 이 습관화돼 모든 걸 참아내면서 “네! 네!”하는 서민들은 우스울 따름이다. 

노자는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긴 듯 보이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라고 했다. 하늘의 그물이 곧 ‘업’이리라. 함부로 쏟아내는 거친 언행들이 습(習)이 돼 굳어지면 어느 날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그물이 돼 머리 위에서 내려온다. 인과법을 깨달으면 몸과 마음이 위로 향할 수가 없다. 그물은 위에서 아래로 펼쳐진다.

[불교신문3393호/2018년5월16일자] 

김영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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