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대 중량 자랑하는 범종

 

천판 정상부에 쌍용 용뉴 표현
뿔 수염 발톱까지 생동감 넘쳐

도성출입 해제시각 알리던 종
사찰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
보살상 일부문양 인위적 삭제
원 상태 훼손시킨 점은 아쉬워

보물 2호 보신각종은 1468년 조성된 조선시대 종이다. 높이 318cm, 구경 228cm, 무게 19.66톤에 달하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금세기 들어 국보 상원사종(上院寺鐘)이 균열로 인해 더 이상 치지 못하게 되었고 보신각종 역시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게 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이전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제야의 종 행사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우리에게 없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들어온 또 다른 일본 문화의 부산물이며 33번을 치는 것은 오히려 불교적 내용과 의식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제야의 종을 치는 12월31일 자정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의 기온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1년 동안 치지 않던 성덕대왕 신종을 33번이나 타종하는 것은 종에 엄청난 무리를 줄 수밖에 없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이 수많은 이전과 유구한 시간을 견디며 손상 없이 보존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마땅히 성덕대왕신종을 타종하면 안 되는 합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될 보신각종 역시 원래는 한양(漢陽)의 도성(都城) 출입과 해제 시각을 알릴 때 쓰는 종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러한 용도로 제작된 종이라기보다 사찰의 범종을 가져다 활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흥천사종(興天寺鐘)보다 훨씬 큰 318cm의 높이에 19.6톤이란 무게에서 볼 수 있듯이 성덕대왕 신종의 18.9톤보다 무거운 우리나라 최대의 중량을 지닌 종이다. 둥글게 솟아오른 천판의 정상부에는 쌍용(雙龍)으로 구성된 용뉴가 중앙부에 몸체가 엉켜 있는 모습으로 솟아있으며 머리를 반대로 한 용두가 표현되었다. 이 용두는 높이 솟은 뿔과 뒤로 쫑긋이 뻗은 양 귀, 수염까지 매우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었고 천판을 누르고 있는 두 발의 예리한 발톱은 기존의 4개와 달리 5개로 늘어난 모습이다. 

생동감 넘치게 표현된 용뉴의 모습.

종신(鐘身)의 상중하부의 3곳에 융기선(隆起線) 띠가 둘러져 있는데, 상부는 한 줄, 중간부분에는 3줄을 둘렀고 종구(鐘口) 위쪽에 2줄의 띠가 장식되었다. 이 종구 위쪽 띠와 중간띠 사이로는 ‘성화4년 2월(成化四年 二月)’로 시작하는 긴 내용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특히 이 종은 조선시대 전기 범종에 거의 빠짐없이 장식되는 연판문대(蓮瓣文帶)와 파도문(波濤文), 연곽(蓮廓)과 연꽃봉우리와 같은 문양이 전혀 표현되지 않아 한눈에 보아도 왕실 발원 종과 다른 이질적인 감이 든다. 그러나 종신 상부 4곳에 희미하게나마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양각(陽刻)되었던 흔적과 연곽과 그 내부에 연뢰가 있었던 점을 확인할 수 있어 조성 당시에는 분명히 사찰에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임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보살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높이는 약 83cm정도이며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측면관에 두광(頭光)이 보이며 늘씬한 신체에는 의습과 발 아래로 연화좌를 확인할 수 있다. 보신각에서 박물관에 옮겨진 후 과학적 분석을 시도한 결과 이 보살상은 분명히 인위적으로 삭제시킨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그 시기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사찰에서 사용하던 범종을 관청에서 재사용하기 위해 사찰 범종의 가장 상징적인 보살상 부분을 일부러 깎아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새겨진 명문의 글은 세조 14년(1468) 권근(權近)이 지은 것으로서 주조에 관계된 인명이 계급과 직급별로 나열되어 있는데, 인명 중에는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한 서거정(徐巨正)의 이름도 보인다. 또한 보신각종은 흥천사 종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왕실(王室) 중심의 발원이 아니고 관(官)에 소속된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다르다. 감독관에 해당하는 23명의 관료들을 제조, 낭청, 아전 순으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제작자인 공장을 85명이나 열거하였는데, 보신각종의 명문에 기록된 장인들은 앞서 만들어진 흥천사종과 달리 구체적인 직급이 없이 공장(工匠)이라는 총칭(總稱)으로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흥천사 종에 등장하는 정길산, 양춘봉, 장금음동, 이만, 김몽총(鄭吉山, 梁春奉, 張今音同, 李萬, 金蒙寵)과 같은 장인이 다시 보신각종에도 등장하고 있는 점은 거의 같은 장인 집단에서 이 종을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 흥천사종 제작을 총괄한 김덕생(金德生)이 정육품 사약(司)에서 종사품(從四品)의 정략장군(定略將軍)으로 승진하고 있음도 확인된다. 

한편 보신각종은 조선시대 왕실 발원 종들이 그러하듯이 이전에도 거처를 여러 번 옮겨 다닌 것으로 파악된다. 종이 걸려있던 보신각은 원래 종루(鐘樓)라 하여 태조(太祖) 4년(1395)에 종을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선조(宣祖) 25년(1597) 임진왜란 당시에 종각과 종이 모두 불탐에 따라 원각사(圓覺寺)에 있던 종을 새로이 옮겨 걸었고, 그 후 고종(高宗) 32년(1895)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을 내려 이 종 역시 보신각종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신각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가에 대해서는 종신의 명문 중에 사찰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나 심수경(沈守慶)이 지은 <유한잡록(遺閑雜錄)>에는 이 종이 원래 신덕왕후(神德王后) 정릉(貞陵)곁에 있던 원찰에 걸려 있던 것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원각사(圓覺寺)로 옮겨졌지만 원각사가 폐사됨에 따라 다시 김안로(金安老)의 건의에 의해 흥천사종과 함께 각각 동대문(東大門)과 남대문(南大門)에 걸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조가 전쟁이 끝나고 한양 환도 후에 다시 이 종을 종각에 걸도록 한 것이라 전해진다. 그러나 <동국문헌비고>에서는 이 종을 흥천사종(興天寺鐘)이라 기록하고 있다. 지난 호에도 소개한 바 있듯이 흥천사종은 현재 서울 덕수궁(德修宮)에 걸려있으며 이 보신각종보다 4년 앞서 1462년에 만들어진 별개의 종이며 크기도 보신각종보다 훨씬 작다. 아마도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자가 종 자체에 종명(鐘銘)이 없고, 흥천사가 신덕왕후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정릉 곁에 있는 사찰이란 점에서 당연히 흥천사 종으로 판단하여 잘못 기록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안로의 건의에 따라 흥천사종과 함께 동대문과 남대문에 각각 걸려고 했다는 내용은 처음부터 흥천사종과 다른 종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신각종은 흥천사종보다 불과 6년 뒤에 만들어진 종이지만 그와 다른 문양의 구성을 보이고 있음이 독특하며 흥천사종과 달리 파도문대가 생략된 점 역시 새로운 변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흥천사종과 달리 종의 조성과 관련된 연유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흥천사종의 주조 장인들과 중복되는 여러 인명으로 보아 세조의 발원과 왕명에 의해 주조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당초 보살상이 조각돼 있었으나 어느 때인가 인위적으로 훼손됐다.

조선전기의 왕실 발원 범종이 당시 왕실의 왕권 강화와 위엄을 반영하듯 당대 최고의 장인과 주조기술을 동원하여 수준 높은 범종을 제작하였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대부분 그 원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음과 달리 언제인지 몰라도 이 종만이 보살상과 일부의 문양을 인위적으로 삭제시켜 원 상태를 훼손시킨 점이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보신각종은 현재 종으로서 그 고유의 기능인 소리를 다신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잘 만들어진 종도 끊임없이 사용하다간 언제가 깨질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교훈으로 남긴 채 오랜 고난과 풍상에서 벗어나 비로소 긴 안식을 취하고 있다.

[불교신문3393호/2018년5월16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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