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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13> 봉림산문 현욱(玄昱)선사“마음과 부처, 중생 차별 없다”…본래성불 강조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 승인 2018.05.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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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13년 수행 후 귀국
실상사 거쳐 고달사로 옮겨가
민애왕…경문왕 귀의 받아

육조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
장경-현욱-심희-진공 ‘법맥’ 

2조 심희, 여주 혜목산 출가
창원 봉림사 창건 ‘산문’ 열어
3조 진공ㆍ찬유 선풍 드높여 

완전함 원만함 상징 ‘일원상’
참본성, 진성이 곧 ‘일심’ 강조

봉림산문 초조 현욱선사 수행터 여주 북내면 혜목산 고달사지.

봉림산문(鳳林山門)은 여러 산문 가운데 아픈 손가락 같은 이미지다. 경남 창원 봉림사지를 찾아가던 날, 정확한 약도나 기록이 없어 찾아 헤매다가 인근 사찰을 방문했다. 스님께 물으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뭐 하러 가느냐?’는 답변이었다. 그래도 몇 마디 말씀을 조언으로 겨우 찾아 갔더니,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제대로 설명해놓은 간판조차 희미할 정도였고, 주변 마을 사람들이 밭으로 개간해 쓰고 있는데다 가축들의 오물도 있었다. 왜 이렇게 주요 사지를 방치하는 걸까? 아쉬운 마음에 사지를 몇 바퀴 돌며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 왔다. 

봉림산문의 개조(開祖)는 원감현욱(圓鑑玄昱, 789˜869년)선사이다. 그런데 이 산문의 개산은 현욱의 제자 심희에 와서 이루어졌다. 현욱선사는 김씨로, 병부시랑의 관직에 있는 아버지와 신라 귀족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처님 형상을 만들거나 모래로 탑을 만드는 놀이, 물고기 살려주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현욱선사는 20세에 출가해 구족계를 받고 헌덕왕 16년(824년)에 당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 754˜815년)에게서 법을 받았다. 현욱에게 법을 사사한 장경은 어떤 인물인가. 장경의 스승인 마조(709˜788년)의 제자는 기록마다 다른데, 수십 여 명에서 수백 여 명에 이른다. 중국 선종(조사선)은 변방 시골에서 발전됐지만 마조 문하에 와서는 정치적인 성향을 띠기도 했고, 왕권과 가까운 제자들이 있었다. 

‘혜목산문’으로 불리기도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마조 문하 선사들을 분류해보면, 중앙제도의 왕족이나 권력과 가까운 제자들, 독자적인 선(禪)을 전개한 제자들, 은둔한 제자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변방의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선풍을 펼친 이들이다. 청규를 제정한 백장(百丈, 720˜814년), 무(無)자 화두를 제창한 조주의 스승 남전보원(748˜834년), 우리나라 세 산문(가지산문·동리산문·실상산문)의 스승인 서당지장, <돈오입도요문론>의 저자인 대주회해, 사굴산문의 스승인 염관제안(?˜842년), 신라 구법승 대모선사의 스승인 귀종조상(?˜827년) 등이다. 

둘째, 마조에게서 심인을 얻은 뒤 은둔한 수행자들인데, 대매법상·양좌주·나부도행·분주무업·오설영묵(748˜815) 등이다. 

셋째, 중앙제도에 진출해 왕권 권력과 밀착된 선사들인데, 이들에 의해 마조계 선사상이 천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선사로는 흥선유관(755˜817년), 장경회휘(757˜816년)·아호대의(746˜817년) 등이다. 봉림산문 현욱에게 법을 전한 장경은 수도권 지역에서 법을 펼쳤던 선사로서 당대에는 큰 선지식이었다. 장경의 신라 제자로 현욱 이외에 각체가 있다. 

현욱은 중국에서 13년간의 수행을 마치고, 희강왕 2년(837년)에 귀국했다. 신라로 돌아온 현욱은 실상사(實相寺)에 머물다가 경기도 여주 혜목산(惠目山) 고달사(高達寺)로 옮겨갔다. 당시 현욱은 승가의 모범이었고, 민애왕(838년 재위)으로부터 경문왕(861˜874년 재위)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의 귀의를 받아 궁궐에 가서 법을 설했다. 

<조당집>에 의하면 현욱선사에 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경문왕은 현욱을 고달사에 머물도록 하였고, 대궐에 선사를 초청해 기이한 향과 묘한 약을 공양 올렸으며, 때맞추어 의복을 공양 올렸다.” 924년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에 신라 말기 전국 유명사원 승려 11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선종 승려로는 쌍계사 진감혜소·성주산문 무염과 더불어 ‘혜목산 현욱’의 이름이 나온다. 당시 현욱선사가 혜목산 고달사에 머물었다고 하여 봉림산문을 ‘혜목산문’이라고도 한다. 

2조 진경대사가 봉림사를 창건했던 창원 봉림사지.

868년(경문왕 9년) 현욱이 입적할 무렵, 문도들을 모이게 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나의 법연(法緣)이 다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무차대회를 열어 나의 스승 백암(百巖)이 전수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이런 뒤에 입적했다. 여기서 백암은 장경회해를 말하는데, 장경이 백암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경문왕이 선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현욱에게 ‘원감(圓鑑)’ 국사 시호를 내렸다. 

봉림산문은 현욱의 제자 심희(審希, 탑호 眞鏡, 855˜923년)에 와서 이루어졌다. 심희의 제자인 진공(眞空, 869˜940년) 선사의 흥법사(興法寺) 진공대사탑비에 봉림산문의 기록이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중국 초기 선종에서부터 시작해 6조 혜능으로부터 5가가 성립됐다. 근대에 들어 강서 마조도일로부터 우리나라까지 선(禪)이 미치었으니, 봉림 가문의 아들이자, 장경 회휘의 증손인 우리 스님(眞空)이 봉림산 선종의 도를 거듭 드날리도다.” 

5가란 마조계의 위앙종과 임제종, 석두계의 조동종·운문종·법안종이다. 이렇게 자세하게 6조부터 시작해 진공에 이르기까지 법맥을 새겨 놓았다. 곧 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장경회휘-현욱-심희(진경)-진공으로 흐르는 법맥이다.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현욱의 뒤를 이은 제자 심희(854˜923년)는 9세에 출가하여 혜목산으로 가서 현욱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을 행각하다가 888년 송계산에 머물면서 수행했다. 이때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설악산에 머물렀는데, 진성여왕이 궁궐로 초청하자, 강릉 탁산사(託山寺)에 은거했다. 얼마 뒤 경남 창원으로 옮겼다. 그곳의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는 성안에 스님의 정진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고, 효공왕은 특사를 파견해 경배의 예를 표했다. 심희선사는 그곳에 봉림사를 창건했는데, 이것이 봉림산문 개산이다. 경명왕(917˜923년 재위)은 심희의 덕을 사모해 흥륜사 언림스님을 통해 심희를 궁궐로 초청했다. 선사가 궁에 들어가 설법을 마친 뒤에 왕으로부터 법응대사(法應大師)라는 존호를 받았다. 심희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다 열반했다. 시호는 진경(眞鏡), 탑호는 보월릉공(寶月凌公)이다.

심희(審希)의 제자로는 진공, 찬유 등이 있다. 진공은 신라 신덕왕과 고려 태조의 왕사를 지낸 분으로 법호가 충담이다. 찬유는 892년에 중국에 들어가 투자산(投子山) 대동선사(819〜914년)로부터 법을 받았다. 찬유는 29년만인 태조 4년(921년)에 귀국하여 왕건의 청으로 혜목산에 상주했다. 찬유는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一心)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며 일심을 강조했다. 찬유선사 문하에는 500여 명에 이르렀고 크게 번창했는데, 이후로는 쇠퇴한 것으로 추론된다. 

봉림산문의 선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다만 선사들의 행적을 통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원상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현욱의 선사상적 측면으로 <경덕전등록>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봉림산의 독특한 사상은 전하지 않고 삼승(三乘) 이외의 특별한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하여 선이 교와 다른 점을 지적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뿐이다.” 

‘본각’ … 조사선 사상 입각

봉림산문 3조인 진공대사 묘탑과 석관(보물 365호).

일원상은 5가7종 중 위앙종의 앙산 혜적(807~883년)이 가장 많이 활용했다. 일원상은 조사선에 채용되었는데, 단순한 원이 아니라 완전함, 원만함을 의미한다. 3조 승찬의 <신심명>에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 부족함도 남는 것도 없다”는 표현이 있다. 진실하고 절대 진리 불성(佛性), 여여(如如), 진여(眞如) 등 깨달음의 근원을 상징한다. 선사들은 불자·여의주·주장자 등으로 공간이나 대지에 일원상을 그리거나, 붓으로 일원상을 그리어 자신의 오도송이나 열반송으로 표현했다. 또한 선사들 사이에 선문답으로도 활용됐으며, 제자들 접인법(接引法)으로 널리 활용됐다. 이 일원상은 송나라 때, 깨달음의 과정을 10단계로 묘사한 그림인 십우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현욱선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당시 선자들이 일원상을 활용했으며, 현욱에게 법을 전한 장경도 일원상을 활용해 제자를 제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일심(一心) 강조이다. 봉림산문의 3세인 찬유는 29년간 당나라에 머물며 수행했다. 고려 초 선풍을 펼치면서 제자들에게 참된 성품이 곧 일심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참 본성이나 진성이 곧 일심으로 표현된다. 이 점은 <화엄경>에도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했다. 참된 성품은 곧 마음을 바탕으로 함이요, 이 일심에는 중생과 부처가 똑같은 성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봉림산문의 선사상은 조사선의 본각(本覺) 본래성불(本來成佛)에 입각한 선사상이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불교신문3392호/2018년5월12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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