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태양 솟는 ‘홍하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

젊은스님 주민 200여 명 운집
해인사 경찰주재소까지 진출
일본경찰 총 쏘며 강제 해산
다른 지역 만세운동도 ‘영향’

1919년 3월31일 오전 11시 해인사 스님 등 2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시작한 홍하문. 지금은 일주문으로 ‘가야산 해인사’ 현판이 걸려 있다. 해강 김규진 글씨이다.

1919년 3월 31일 오전 11시 합천 해인사 홍하문(紅霞門) 앞에 200여 명 안팎의 스님과 주민이 모였다. 그해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서다. 해인사 젊은 스님들은 군중과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만세운동의 바람이 가야산 해인사까지 불어 닥쳤다.

집회를 마친 군중은 대열을 지어 산문(山門)을 나섰다. 조선 독립에 대한 열기가 높았던 젊은 스님들은 합세한 주민들과 일본 경찰이 상주하고 있는 ‘해인사 주재소’ 앞에 도달했다. ‘주재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가 팔만대장경 보호를 명분으로 주재소와 경비전화를 설치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해인사 경내와 그리 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 보호라는 미명아래 항일(抗日) 의식을 지닌 스님들을 감시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시위대열에 깜짝 놀란 일경은 군중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물러나지 않자 결국 총을 쐈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던 ‘맨손의 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님들과 주민들은 뜻을 접지 않았다. 그날 오후 11시 야심한 시간에 200여 명의 군중이 다시 모였다. 해인사 지방학림(지금의 강원에 해당)에 재학하는 홍태현(洪泰賢), 백성원(白聖元), 김경환(金景煥), 김성구(金聖九) 스님 등이 주동해 해인사 앞 도로를 점거하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은 또 다시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이날 시위에서 검거된 홍태현 스님(23세)은 그해 6월 1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6개월 형을 언도 받았다. 황해도 해주군 석동면 신광리 출신이었다. 스님은 재심 청구를 했지만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일주문 안쪽에 걸려 있는 ‘홍하문’ 현판. 1930년대 중반의 사진을 보면 지금 현판보다 큰 크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산중 깊숙이 자리한 고찰(古刹) 가운데 적지 않은 도량이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렸지만 유엔 사령부의 폭격 명령을 거부한 김영환 장군의 결단으로 해인사는 옛 모습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장경각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이 보존되고 있다. 지난 4월 23일 찾은 해인사는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던 젊은 스님들의 기개와 기꺼이 동참했던 주민들의 의지를 보여주듯 웅장한 사격(寺格)을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 젊은 수행자들이 주민들과 독립만세의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을 지켜본 홍하문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지금은 일주문 역할을 담당했다. 해강 김규진이 쓴 ‘가야산 해인사’ 현판 뒤쪽에 ‘홍화문’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홍하’는 해 주위에 보이는 붉은 노을이라는 의미로 아침에 솟는 해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는 의미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사바세계에 떠올라 불국정토(佛國淨土)로 장엄한다는 것이다. 99년 전 홍하문 앞에 집결한 해인사의 젊은 스님들은 외세에 뺏긴 조국을 되찾아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 스님들의 기개는 새벽 바다 속에서 힘차게 올라와 어둠을 밝힌 태양과 다름 없었다.

해인사 스님들의 거사는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만해스님 그리고 불교중앙학림 학생(스님)들의 영향을 받았다. 전국 각지의 사찰을 거점으로 스님들이 주도적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해인사 스님들은 ‘독립선언서’를 입수했다.

서울에 있는 도진호(都鎭浩), 김봉신(金奉信), 김용기(金龍基), 최항형(崔恒亨) 스님은 각각 해인사에 있는 송복만(宋福晩), 김봉률(金奉律) 박근섭(朴根燮), 최범술(崔凡述) 스님에게 독립선언서를 보내며 3·1운동 상황을 전했다. 이 가운데 김봉률 스님은 1897년 합천 출생으로 김천 직지사 주지를 지냈다. 1949년 5월 원적에 들었으며,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직지사는 지난해 3.1절을 맞아 포월당 봉률스님의 추모재를 봉행했다. 최범술 스님은 1904년 태어나 1979년 세상을 떠났다. 법호는 효당(曉堂). 이후 만당(卍黨)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35년 3월20일 촬영된 해인사 홍하문. ‘가야산 해인사 현판’이 걸려 있다. 비슷한 시기에 ‘홍하문’ 현판이 크게 걸려 있는 사진도 있다. 출처=<조선고적도보>

일제강점기 해인보통학교와 지방학림에는 300여 명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사를 결행하기로 뜻을 모은 젊은 스님들은 사중(寺中)과 학교에 있는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문 1만매를 등사(謄寫)했다. 송복만, 강재호 스님 등은 친일 주지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독립선언서 인쇄에 필요한 종이를 대구까지 가서 구해왔다.

당시 해인사 주지는 친일파 승려 이회광(李晦光)이었기에 비밀리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30명의 젊은 스님들은 장경각 뒷편 숲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3월 31일 홍하문 앞에서 만세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던 것이다.

경상남도가 작성해 총독부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30본산사(本山寺)인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세 개의 절은 모두 많은 승려가 있어, 불온한 언동으로 나오지 않는다고는 보장하기 어렵다”면서 “주의하고 있던 중, 마침 이태왕(고종) 전하의 흉거(凶去)에 즈음해 많은 독경을 하고 명복을 빌며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해인사로부터 서울에 가 있는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이 이미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특히 일반 승려계에 대한 주의를 몇 배 더 기울였다”고 전하고 있다. 3월31일 시위후 군중이 해산 한 후 “승려의 신발이 흩어져 남아있던 사실로써, 이 절(해인사)의 불량 승려가 참가했다는 것을 족히 알 수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해인사 스님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3월1일 오후 11시 해인사 도반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태현 스님의 ‘판결문’. 1919년 6월28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이다. ‘해인사 지방학림 학생’으로 ‘승려’라고 표기되어 있다. 출처=국가기록원

해인사 스님들의 독립만세운동은 단순히 합천 지역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인연 있는 사찰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해인사 스님들은 비밀리에 ‘3개 그룹(三隊)’을 만들어 지역별로 독립선언서를 지닌 담당자를 파견했다.

이들은 일경의 검거망을 피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일부는 체포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박달준(朴達俊) 스님은 1894년 거창에서 태어나 1965년 입적했다. 그 뒤로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비록 해인사 스님들의 거사가 당장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상해임시정부, 독립군, 만당(卍堂) 등에 참여하며 구국의 정신을 이어갔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스님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상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항몽 정신이 깃든 팔만대장경과 임란 당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뜻을 이은 젊은 스님들의 정신은 홍하문처럼 빛났다. 

다른 지역도 파견

해인사 스님들이 1919년 3월31일 거사를 기점으로 각 지역에 파견한 3그룹은 다름과 같다. 괄호 안은 파견 지역. △제1대(경주,양산,통도사,범어사,동래,부산,김해) 강재호, 김봉률, 기상섭(奇尙燮) △제2대(합천,삼가,초계,의령,진주,사천,곤양,하동) 송복만, 송복룡(宋福龍), 최범술 △제3대(거창,안의,함양,산청,남원) 박달준, 박덕윤(朴德潤), 이덕진(李德進), 김장윤(金章允)

이밖에도 △공주 마곡사 = 우경조(禹敬祚), 나경화(羅慶華) △보은 법주사 = 박윤성(朴允成) △서산, 상주 = 김경환(金景煥) 등 △김천, 성주 = 김도운(金道運), 이봉정(李奉政), 남성엽(南成葉) △거창 = 남광옥(南光玉), 신경재(愼慶宰), 김명수(金明洙) △고령, 현풍, 대구 = 신철휴(申喆休), 신난휴(申蘭休), 이종직(李從直) △달성, 영천 = 권청학(權淸學) △쌍계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 구례, 강진, 보성, 담양 = 박근섭, 박응천(朴應天), 신문수(申文守), 정봉윤(丁鳳允) 등이 활약했다.

참고자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시스템’, ‘홍태현 판결문’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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