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꾸미가 나는 철 
대방어가 맛있는 철 
닭볶음이 당기는 날 
생참치 들어온 날… 

주인이 따로 만들어 내는 
메뉴 밖의 음식은 규격도 
값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셈을 치를 때마다 
한바탕 승강을 벌이지만 
정녕 살아있는 음식이다

지금 일하는 대학의 앞 골목에 ‘한양동태’라는 식당이 있다. 이름 그대로 동태 요리 전문이다. 단골이 된 다음, 야무지면서 선한 인상의 주인 내외가 늘 반갑다. 간단히 식사만 할 때는 동태탕을 시키지만, 몇이라도 어울려 소주 한 잔 할라치면 우럭초무침을 부탁한다. 진하게 끓인 미역국을 내줘서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낙지 비빔밥을 새로운 메뉴로 내놓았다. 

참기름을 대접 바닥에 바르고 맞춤하게 삶은 콩나물 위에 잘게 썬 상추, 무순, 김 가루 등을 얹었다. 그리고 매콤하게 양념된 낙지볶음을 가져다준다. 밥과 함께 섞어 비비면 훌륭한 비빔밥이 되는데, 쫄깃한 낙지와 신선한 야채가 참기름에 섞여 고소하고 맵짜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점심 저녁으로 그렇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비빔밥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쓴 시 가운데 그나마 알려진 작품이 ‘비빔밥’이다. “혼자일 때 먹을거리치고 비빔밥만한 게 없다”고 시작하는 시는 “허기 아닌 외로움을 달래는 비빔밥 한 그릇/ 적막한 시간의 식사”라는 구절이 공감 가는 모양이다. “여러 동무들 이다지 다정히도” 모인 밥 한 그릇이 그렇다. 그러나 이 시를 착상한 조그마한 식당은 없어졌고, 오랫동안 대신할 만한 곳을 찾지 못하였다. 나로서는 참 다행한 일이다. ‘비빔밥’을 떠올리자면 그 시처럼 먹을 비빔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비빔밥이야 중국집의 짜장면처럼 어디서 먹어도 입맛에 아주 들지 않는 경우란 드물다. 심지어 집에서 내가 만들어먹는 비빔밥조차 맛있다. 큰아이는 때로 내게 비빔밥을 만들어 달라 부탁한다. 나물을 주재료로 하든, 물김치에 버무리든, 저마다 특색 갖춘 비빔밥이 된다. 너무 거창한 재료에 너무 화려한 꾸밈은 비빔밥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오랜만에 입맛 드는 식당을 가졌으니 생각만 해도 부유한 느낌이다. 

이미 단골이 된 이 식당에 가는 색다른 재미가 생겼다. 주인이 제철 제날 재료로 만들어주는 ‘메뉴 밖의 음식’ 때문이다. 주꾸미가 나는 철, 대방어가 맛있는 철, 닭볶음이 당기는 날, 생참치 들어온 날…, 주인은 거기 맞추어 자기 식당의 메뉴에 없는 음식을 만들어 준다. 솜씨 참 맵차다. 정녕 세상에 가장 맛있기로는 메뉴 밖의 음식이 아닐까. 

물론 어떤 식당이든 간판에 건 메뉴로 손님을 끈다. 그러므로 메뉴 밖의 음식을 극찬하는 것은 메뉴에 적힌 음식을 무시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간판의 메뉴는 단지 나를 장사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규격이 있고 값은 정해져 있다. 이에 비해 주인이 따로 만들어 내는 저 메뉴 밖의 음식은 규격도 값도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셈을 치를 때마다 한바탕 승강을 벌이지만, 이것은 정녕 살아있는 음식이다. 

내가 속한 학과의 대학원생은 토요일에 수업을 한다. 대부분 직장인인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이다. 오후6시 반이면 수업이 끝나는데, 모두들 모여 저녁식사까지 하고 헤어진다. 그동안은 학교 앞 여러 식당을 전전했는데, 이번 학기에는 방법을 바꾸었다. 한양동태에 ‘대놓고’ 먹기로 했다. 주인은 일주일 내내 궁리하여 30여 명의 식사를 준비한다. 오후5시쯤이면 대표가 핸드폰 문자로 저녁 메뉴를 알려온다. 기진해서 맥이 풀릴 무렵, 문자를 확인하는 선생과 학생의 눈에 반짝 불이 켜진다. 

[불교신문3389호/2018년5월2일자] 

고운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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