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발원 범종 서막을 열다

 

신덕왕후 명복 빌기 위해 조성
흥천사 소실 후 광화문으로 이운
현재 덕수궁 광명각 안에 보관

각 분야 장인들이 직접 참여한
왕실발원 기준작이자 모본 평가 

서울 덕수궁에 소장된 흥천사 종은 높이 282cm로 1462년에 조성됐다.

조선 건국 이후 15세기에는 왕실발원 범종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러한 이유는 당시 한양을 중심으로 왕실 발원의 중창이나 개창과 같은 불사(佛事)가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흥천사, 원각사와 같은 비보사찰(裨補寺刹) 내지 능묘의 원찰(願刹)이 많이 세워지는 시기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즉 처음부터 왕실 발원 범종은 왕실 일가의 명복과 안녕을 빌거나 축수의 개념에서 당시의 최고의 전문가 집단을 고용하여 제작하였다는 특성을 지닌다. 아울러 조선전기의 범종이 크기 면에서 이후에 만들어지는 종들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대형화된 것은 바로 조선 왕조의 개국에 따라 규범이 정해지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작품이 필요케 된 것도 한 원인이 될 수 있겠다. 

이번호에 소개할 흥천사종 역시 그러한 시기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왕실 발원 범종 가운데 가장 이른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종의 조성 목적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종이다. 1510년 흥천사가 소실된 이후 1747년에 경복궁 광화문에 옮겨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광화문에서 창덕궁으로 이전됐다. 이후 다시 거처를 덕수궁으로 옮기게 되어 현재는 광명각 안에 자격루와 함께 보관 전시돼 있다. 총고는 282cm, 구경 171.2cm, 두께 296cm로 종신의 4면에는 보살입상 4구가 부조되었고 명문에는 천순(天順) 6년(1462) 제작된 것이라 기록되어 조선 왕실 발원 범종 가운데 가장 먼저 제작된 종이다. 

종신은 종구 쪽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부풀어진 듯 보이며 종구의 끝단은 수평을 이루었다. 쌍룡의 용뉴, 반구형의 천판, 종신보다 한 층 더 높게 융기된 넓은 구연부 등이 전체적으로는 중국에서도 북방 양식인 하엽종(荷葉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종구는 그와 달리 직선화된 우리 종의 양식을 고수하였다. 특히 둥그스름한 천판 위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을 맞대고 꿇어 앉아 있는 용뉴의 형상이나 천판의 아래쪽으로 연판문대가 돌려져 있고 연판대와 종신 부분에 굵은 횡대(橫帶)를 둘러 구획을 이룬 모습은 중국의 원(元)이나 명대(明代)종 양식과 유사한 점이 나타난다. 

 쌍룡의 용뉴.

종의 몸체에는 중앙에 굵은 3조의 횡대를 중심으로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는데, 상단의 종신에는 한국 종의 전형 양식인 방형의 연곽(蓮廓)과 그 내부에 화문 받침을 지닌 얕게 돌기된 연뢰(蓮)를 9개씩을 배치하고 그 연곽과 연곽 사이의 사방으로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을 새겼다. 하단의 종신에는 다시 굵은 횡대로 구획하여 위쪽에는 양각의 명문을, 아래쪽에는 파도문을 새겨놓았다. 이처럼 굵은 횡대로 종신을 가로질러 분할하는 방식은 고려 후기의 연복사종(演福寺鐘, 1346)에서 볼 수 있는 중국 종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이지만 흥천사 종의 모습은 1447년에 제작된 베이징(北京) 소재의 법해사종(法海寺鐘)과 같은 명나라 종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종신의 연곽과 연곽 사이의 네 방향에 배치된 보살입상은 늘씬한 신체에 원형 두광을 갖추고 합장한 모습이다. 보살상의 양 어깨에 걸쳐진 천의가 팔을 거쳐 발아래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렸고 머리에 쓴 보관에는 화려한 영락까지 세밀히 표현되었다. 이러한 보살입상의 모습은 이후 제작되는 조선 범종의 하나의 전형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방형의 연곽 안에는 연화좌 위로 돌기된 연뢰가 표현되어 고려 말에 유입된 중국 종 양식과 또 다른 한국 전통형 종의 잔영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온 부분에는 하대(下帶)처럼 묘사된 파도문대가 있는데, 이곳에는 오른쪽으로 일정하게 반원을 그리는 파도무늬를 유려하게 묘사하였다. 이 횡대와 문양대 사이의 넓은 공간을 택해 한계희(韓繼犧)가 짓고 글씨는 정란종(鄭蘭宗)이 쓴 긴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세조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1462년에 흥천사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사리분신(舍利分身)이라는 상서로운 일(瑞祥)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종을 만들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세조 6년(1461년) 5월13일 회암사(檜巖寺)에서 석가여래의 금사리(金舍利)가 분신(分身)하였는데, 효녕대군(孝寧大君)이 25매를 얻어 세조에게 올리자 이 사리가 내전(內殿)과 함원전(含元殿)에서 계속 분신하여 모두 102개가 되었다. 이에 세조가 이 일을 크게 기뻐하여 죄수를 사면하고 능엄경을 번역하였으며 여래상 두 구와 관음· 지장보살상을 만들어 안치하였고 사리는 흥천사의 사리각에 모셨다. 세조는 이 사리분신을 기념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 다음해인 세조 7년(1462년)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사리 분신의 의미를 강조하여 명문에 기록한 것은 서상(瑞祥)을 계기로 왕실이 길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결국 세조의 왕위 찬탈을 합리화시기 위한 방편으로 불교의 신이와 영험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흥천사는 원래 태조 이성계의 후비였던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부근에 세워졌던 원찰로서 1397년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화재로 인해 원래의 흥천사가 소실되어 이후 1794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종신의 4면에는 보살입상 4구가 부조됐다.

또한 흥천사종의 명문에서는 범종을 제작한 주조 장인과 분업상황이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그에 의하면 종 제작을 감독하였던 인물은 정육품 김덕생(金德生)이며 정길산(鄭吉山), 이장수(李張守), 이산(李山), 안성노(安盛老), 방내은사(方內隱山), 백산보(白山寶) 등은 주성장(鑄成匠)으로 기록된 점에서 실질적인 종 제작을 담당하였던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금속을 녹이고 붓는 노야장(爐冶匠) 김몽총(金蒙寵), 녹인 금속을 주종 틀에 붓는 작업을 당당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주장(注匠) 이만(李萬), 장오마지(張吾₩}知), 홍복흔(洪福熏), 박효(朴孝), 구지금(仇知金) 등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특히 조각(彫刻)의 양춘봉(梁春奉), 장금동(張今同), 덕중(德中), 장오마지(梁吾₩}知)와 목수(木手) 지상(智尙), 김우길(金尤吉), 진동(秦同) 등의 장인들은 복잡한 조형을 필요로 하는 용뉴와 문양판 제작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금속의 물품을 조달하거나 제작하였던 수철장(水鐵匠) 이득방(李得方), 박천길(朴千吉), 박 (朴), 양생(梁生), 차영수(車永守)와 각자(刻字) 김귀생(金貴生)은 명문을 쓰거나 새기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흥천사 종의 명문을 통해 당시 종 제작을 총괄한 이가 정6품 사약(正六品 司)의 관직을 지닌 관료였음이 파악되지만 조각을 담당했던 봉승대부(奉承大夫) 양춘봉(梁春奉)을 제외하고 나머지 주조 장인의 직급은 밝히고 있지 않아 아직 그 신분상의 대우가 높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명문 제작을 담당하였던 김귀생(金貴生)의 경우 관직이 정육품 전악(典樂)에 해당되는 점은 각자장(刻字匠)이 장악원(掌樂院) 소속이었거나 평시 업무가 장악원과 관련되었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범종의 종신에 장식되는 보살상이나 상·하대 문양의 도안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최경(崔涇)은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도화서(圖畵署) 최고 관직에 오른 인물로서 이를 통해 왕실 범종 제작에는 도화서에서 선발된 최고의 수준을 가진 화원(畵員)이 직접 참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이 지닌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말해주며 이후 조선 후기종의 보살상의 도식화된 모습과 차별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흥천사 종은 제작에 관련된 세세한 분업 상황이 각 직급별, 내용별로 기록된 점에서 조선시대 범종의 제작과 관련된 주조 기술사 연구에 더없이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조선 전기 범종에서 가장 먼저 제작되어 이후 제작된 왕실 발원 범종의 기준작이자 모본이 된 작품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불교신문3389호/2018년5월2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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