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고 난 후 조명이 켜지자 산사는 다른 세상이 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걸린 색색의 연등 너머로 고층빌딩에서 나오는 불빛이 보인다. 도심 속 산사 봉은사라서 더 잘 보이는 풍경이다.

봉은사의 매력이라면 도심에서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 무역센터와 복합쇼핑몰, 백화점, 도심공항터미널이 밀집된 영동대로 복판에서 천년고찰은 왠지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강남에서 산사는 오아시스나 다름없다. 낮에는 신행 활동하는 불자들로 가득한 가운데 테이크아웃 잔을 손에 들고 봉은사 뒷산을 산책하는 직장인을 볼 수 있다. 밤에는 낮과 다른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한낮의 북적임은 사라지고 고요함이 찾아온다. 은은한 조명 속 봄꽃이 어우러진 풍치(風致)에 마음이 절로 평안해진다. 뒷산에 올라 미륵대불과 함께 화려한 도심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유명 관광지도 부럽지 않다.

진여문 너머 펼쳐진 다른 세상

어둠이 내려앉은 미륵대불 너머로 코엑스가 보인다.

지난 16일 오후5시30분 봉은사. 아침부터 초하루법회를 봉행하기 위해 북적였을 도량이 한산하다고 느낀 것은 순간이다. 서쪽으로 넘어간 해가 건물유리창으로 비추는 시각에도 사찰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잔잔한 물결처럼 끊이지 않는다. 관광을 나선 외국인들도 있다. 사찰 초입 불교용품을 파는 응향각으로 가는 불자들도 있다. 부처님 전에 올릴 초와 쌀을 사서 이름을 쓰고 정성껏 서원을 적는 모습에서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진여문에 들어서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옴을 알리는 색색의 연등이 하늘을 장엄하고 있다. 길게 늘어진 연등 물결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열에 아홉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눈으로만 보기 아쉬운 듯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으로 남기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대웅전 앞마당도 빽빽하게 걸린 연등으로 하늘이 가려진다. 선불당 툇마루에는 둘셋 씩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기도하는 불자들이 있다. 그 곁에 앉으니 차갑지 않은 봄바람이 느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등표가 흔들리는 모습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저녁예불 시간이 가까워오자 종루에서 스님이 법고를 친다. 힘차게 울리는 법고소리가 대웅전 앞마당을 가득 메운다. 소리를 따라 종루로 사람들이 모였다. 조용히 서서 귀 기울여본다.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폐가 될 정도로 고요함 속에서 오직 북소리만 들린다. 범종 타종소리도 멀리 퍼져나갔다. 소리가 깊어질수록 몸도 마음도 울림이 더해간다. 법고, 범종, 운판, 목어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은 예불 때마다 쓰는 불구다. 범음(梵音)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목어는 물고기, 운판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조류, 법고는 뭍에 사는 중생,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위한 부처님 음성이다. 이끌리듯 종루로 와 법음을 들은 사람들은 잠시잠깐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도심 빌딩 속 아직도 일하고 있는 누군가에도 종소리가 전해졌으리라.

해가 진 후에도 여전히 많은 불자들이 기도한다.

해가 길어지면서 오후7시가 넘어야 비로소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량에도 하나 둘 조명이 켜지면서 봄밤 산사는 운치를 더해간다. 불을 환하게 밝힌 대웅전에서는 예불을 끝낸 불자들이 절을 하며 기도를 이어가고, 지장전에서는 지장기도가 계속됐다. 저녁예불이 끝난 후에도 사찰에는 퇴근길에 온 듯한 직장인들을 찾을 수 있다. 젊은 청년 불자는 양 손에 쌀과 초를 들고 법당으로 향했다. 3층석탑 옆은 초를 공양하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덕분에 저녁에도 환하다. 중년의 남성은 미륵대불 앞에 서서 간단히 예를 올리고 돌아가기도 하고, 미륵전에는 늦은 시간까지 혼자 기도하는 남성도 보인다. 

봄밤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데이트 겸 사찰을 찾아온 청춘들도 눈에 띈다. 미륵대불 앞에 앉아 오랫동안 기도하고 얘기하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손 꼭 잡고 봉은사 뒷산을 산책하는 커플도 보인다. 대웅전 마당에 걸린 연등을 배경으로 자신들만의 추억을 남기기에 열중인 연인들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살아 있는 박물관이자 쉼터

봉은사는 도심 한 복판에 위치해 있는 전통사찰이면서 동시에 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불자들이 신행활동을 하고 스님들이 수행하고 법을 전하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고, 곳곳에 문화재가 즐비하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서울시유형문화재도 수두룩하다. 

저녁 영산전으로 향하는 불자의 모습.

추사 김정희가 쓴 ‘판전’ 편액과 선불당, 대웅전에 봉안된 삼장보살도 등 탱화, 북극전 칠성도, 영산전 십육나한도와 나한상 등 발길 닿고 눈길이 머무는 곳은 다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 있는 박물관인 동시에 서울시민의 쉼터역할도 하고 있다. 열린 도량인 봉은사는 새벽예불이 시작되기 전인 오전3시부터 밤12시까지 문을 열어둔다. 전각은 오후10시에 문을 잠그기 때문에 늦게 와서도 기도할 수 있다. 도심에 위치한 까닭에 늦은 저녁에도 산책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산길 초입에 들어서듯 흙길을 걸을 수 있어 가족 친구 연인들이 자주 찾아온다.

요즘처럼 꽃피는 계절엔 더 말할 것도 없다. 종루 앞 라일락 나무는 봉은사 대표 꽃나무이기도 하다. 지난해부터 라일락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라일락음악회’를 열어 꽃향기와 함께 음악을 즐기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 19일에도 국악과 서양음악이 어우러지는 음악회를 선보여 신도들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맡아지는 라일락꽃 향기는 어떤 비싼 향수보다 향기롭고 매혹적이다. 영각(影閣)으로 향하는 길목에도 붉은 빛깔을 자랑하는 철쭉꽃은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봄꽃 구경을 아직 하지 못했다면 봉은사에서 꽃놀이를 해도 좋다.

불자들 염원이 적힌 복주머니가 걸린 북극보전.

봉은사의 낮이 불자들로 가득한 신행시간이라면, 밤은 보다 열린 공간이다. 도심사찰답게 늦은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의 기도처이자 쉼터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 친구, 연인들과 추억을 쌓는 명소이기도 하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활력을 찾고 싶다면 봉은사로 발길을 돌려보면 어떨까. 산사의 봄밤을 만끽하지 않고 미뤄두기엔 봄은 너무 짧다.

응향각에서 공양물을 사서 서원을 적는 불자들.

[불교신문3387호/2018년4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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