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낭독하고 주민들과 ‘대한독립만세’

만해 스님 특명 받은 ‘오택언’ 
통도사 학림 스님들 거사 도모
신평장날 맞아 만세 운동 결행

1919년 3월13일 통도사 지방학림 스님들은 마을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사진은 지방학림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영축총림 통도사 성보박물관.

1919년 3월 13일, 양산 통도사 앞 신평마을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장날이었다. 생필품을 사고 팔려는 주민과 상인들 사이로 통도사 스님들이 보였다. 이날 통도사 지방학림(地方學林)에 다니는 김상문(金詳文) 스님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 학생들이 따랐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과 함께 소리 높이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같은 해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경향 각지로 번져나갔다. 경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3월 11일 부산 초량에 있는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했다. 그 뒤를 이어 같은달 13일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신평마을 장터에서 만세를 주도했다.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마을 장터는 영축총림 산문(山門)과 이어진 길(지금은 통도문화예술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신평마을 장터’의 현재 모습. 지금은 ‘신평시장’이다.

3월 13일 신평장터 만세운동은 만해 한용운 스님의 밀명을 받고 통도사에 온 오택언(吳澤彦) 스님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통도사 출신 스님으로 불교중악학림(지금의 동국대)에 재학하고 있었다. 백성욱(白性郁), 깁법린(金法麟) 등과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지방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조직하라는 만해스님의 특명(特命)을 받고 통도사에 왔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따르면 오택언 스님은 1897년 6월 17일 ‘경남 양산군 읍내(邑內)’에서 출생했다. 본적은 경남 양산군 하북면 통도사,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숭일동(崇一洞) 2 중앙학림 기숙사로 기록되어 있다. 신분은 평민(平民), 직업은 학생, 지문(指紋)번호는 67846-76749이다.

이 카드에 실린 사진은 정면에서 촬영한 1장, 측면에서 촬영한 1장 등 모두 2장이다. 정면 사진은 왼쪽 가슴에, 측면 사진은 오른쪽 어깨에 한문으로 쓴 이름을 붙였다. 입을 꽉 다물어 야무진 모습이다. 뺏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다. 카드에 기록된 신장은 ‘5척(尺) 4촌(寸) 7푼(分)’으로 166.05cm에 해당한다.
 

통도사 스님들과 3.13 만세운동을 도모한 오택언 스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수형자기록)’에 실린 사진이다..

통도사에 내려온 오택언 스님은 젊은 스님들을 비밀리에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양산향토사연구회가 2009년 발간한 <양산항일독립운동사(증보판)>에는 “오택언이 한용운 선생의 밀지를 받고 독립선언서 등을 휴대한 채 3월 5일 통도사에 도착했다”고 기록돼 있다. 거사일은 3월13일로 정했다.

오택언 스님은 3월7일 체포된다. 만세운동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지만, 통도사 젊은 스님들은 뜻을 접지 않았다. 당시 통도사 지방학림 대표 김상문 스님을 비롯해 양대응, 박세문, 이기주, 김진오 스님 등 40~50명의 학생과 강원 스님 10여명, 그리고 통도사에 주석하는 스님 10여 명이 만세운동을 결행했다. 

3월13일 신평장터에서 통도사 스님들은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동시에 낭독했다. 장터를 찾은 주민들과 함께 한 이날 만세운동은 3.1운동 발생 10여 일 만에 지방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월7일 검거된 오택언 스님은 3월13일 서울로 이송돼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동자 김상문 스님은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진오(金鎭五) 스님은 2년형을 선고 받았다. 오택언 스님은 서울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됐다.
 

3.13 만세운동에 참여한 양대응 스님. 해방 후 첫 통도사 주지를 지냈으며, 201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다.

오택언 스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9. 2. 29 서울에서 민족대표 한용운으로부터 독립선언서 3000여 매를 받아 독립만세시위시 이를 시민에게 배포하는 등 활동을 하고 동일 밤에는 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청진동 일대에 배포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고 미결(未決) 기간을 합산하여 1년 여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이 공적조서에서는 통도사 신평마을 만세운동 내용이 빠져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돼 1년여 옥고를 치렀다. 1970년 2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오택언 스님의 3.1운동 이후 정확한 행적은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동아일보>를 통해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23년 10월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불교청년회 창립’이란 제목의 기사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동아일보>는 “양산 통도사 마산포교당에서 수일 전부터 포교사 황현암(黃玄菴), 장재륜(張在輪), 오택언(吳澤彦) 제씨(諸氏)의 발기로 불교청년회를 조직키로 위하야 …”라면서 “거(去, 지난) 3일 오후 3시에 … 창립총회를 개(開)하고 … 익일(翌日, 다음날) 오후 8시 동소(同所, 같은 장소)에서 회의를 속개하야 임원을 선거하야”라고 보도했다.

1923년 8월23일자 <동아일보>에는 서북지역 수해 구제를 위해 마산에서 조직된 후원위원회에 오택언 스님이 참여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같은 해 9월6일에는 수재의연금으로 2원(圓)을 기부한 내용도 신문에 실렸다. 1938년 1월11일자 <동아일보>에는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재민 돕기 성금으로 1원(圓)을 기탁한 내용이, 1939년 5월25일자에는 ‘양산군 하북면’ 면의원으로 선출된 기사가 게재돼는 등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통도사와 마산 등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3월13일 신평장터 만세운동 이후 양산에서는 3월 27일, 4월 1일, 5월 4일 주민들의 만세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5월 4일 만세운동은 일본 헌병 무기까지 빼앗고 언양까지 진출했다.

통도사 산문 입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이동하면 전통재래 시장인 신평장(新坪場)이 있다. 하북면사무소 뒤편이다. 조선시대 양산과 밀양 주민들이 한피기 고개를 오가며 이용할 정도로 상권이 발달했다. 1942년 문을 연 신평시장이 신평장터이다. 2004년 정비를 거쳐 50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다. 3일과 8일에 5일장이 선다.

한편 양산시청과 지역 사회단체들은 매년 3.1절 기념식 행사를 열고 있다. 일본강점기 신평장과 양산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다. 2006년부터 매년 ‘양산 3.1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하고 있다.


■ 오택언 스님 ‘판결문’

피고 오택언은 대정 8년 2월28일 학생 정병헌(鄭秉憲) 외 여러 명과 함께 주모자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위의 손병희 등 명의의 ‘독립선언서’ 약 3천장을 받아 이를 경성부 내에 배포하여 일반 시민을 선동할 것과 또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에 모여 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유 받자 그 취지에 찬성하여 다수 공동으로 불온의 행위를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할 것을 계획하여 동년 3월 1일 오후 2시경 동 공원에 가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동 공원에서 대한문(大韓門) 앞 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군중과 함께 경성부 내를 광분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고 또한 계속적 의사로서 그날 밤 다른 학생 여러 명과 함께 경성부 청진동(淸進洞) 기타의 각 조선인 민가 등에 위의 선언서 약 100장을 함께 배부하여 다중을 선동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


■ 통도사 ‘충절의 오대사’

3.13 신평장터 만세운동에 오택언 스님과 함께 참여한 양대응(梁大應, 1897~1968)을 비롯해 ,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김구하(金九河, 1872~1965), 항일 의식을 전파한 조병구(曺秉球, 1908~2003), 김말복(金末福, 1909~1985) 스님을 ‘충절(忠節)의 오대사(五大師)’, ‘통도오절(通度五節)’로 불린다.

이 가운테 양대응(속명 양만우) 스님은 2010년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지시에 따라 오택언(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동기)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전달받고 같은 달 13일 하북면 신평리 장터에서 김상문, 박세문, 이기주 씨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유공자 인정 사유를 밝혔다. 대응스님은 만세운동 참여후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2년 3월 친일승려인 용주사 강대련(姜大蓮) 명고축출(鳴鼓逐出) 운동을 주도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독립운동-민족주의운동 편> <양산시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양산향토사연구회, <(증보판)양산항일독립운동사>, <양산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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