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목적 없는 몸을 만든다. 그리고 목적을 만든다.’ 

최근 한 TV프로그램에서 과거 ‘수사반장’으로 유명했던 원로배우인 최불암이 자신의 연기 비결로 제시한 내용이다. 30대의 젊은 시절부터 60대의 노인역할을 자주 연기해야했던 이 배우는 고심 끝에 먼저 자신이 30대의 젊은이라는 사실을 잊어야했다. 그러기 위해서 ‘목적 없는 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는 배역에 걸 맞는 목적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 역할, 수사반장 역할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말로 ‘참 나는 무아(無我)요, 무아는 대아(大我)’라고 하는 불교의 이치를 생활 속에서 구현한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리인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텅 빈 것이며, 텅 비었기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만 변화하는 현상만이 있을 뿐!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현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예컨대 관세음보살은 32가지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한다. 부처의 몸으로 나타나 제도할 이에게는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신의 몸으로 나타나 제도할 이에게는 신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남자의 몸으로 나타나 제도할 이에게는 남자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여자의 몸으로 나타나 제도할 이에게는 여자의 몸을 나타내어 제도한다. 한 마디로 ‘이 몸이 내 몸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 없기에 어떠한 몸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목적 없는 몸을 만든다는 것은 백지상태를 만드는 것이며, 목적을 만든다는 것은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먼저 무아를 체험하고, 이어서 서원이라는 밑그림을 그려서 색칠해나가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무아법에 통달한 이가 진정한 보살이라고. 

무아연습은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아는 것을 알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여기에 ‘나’는 없다. 고정된 ‘나’가 없으므로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불교신문3385호/2018년4월18일자] 

월호스님 논설위원·행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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