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휴일 아침이었다. 길을 나서는데 집 근처 도로변 주차장에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한 중년 남자가 운전석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느껴졌다. 고요하리만큼 너무 곤히 잔다고나 할까.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경찰에 신고할까 망설이다가 뒤로 획 젖혀진 의자를 보고 내버려뒀다. 애먼 짓으로 괜히 그의 단잠을 깨울 것만 같았다. 나중에 보니 차는 그대로 있고 사람이 안보였다. 그는 잠깐 눈을 붙이고 여느 가장들처럼 집으로 돌아간 게 분명했다. 며칠 후 그 차 앞을 지나는데 와이퍼 쪽에 하얀 게 눈에 들어왔다. 국화꽃이었다. 들리는 얘기론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웠다고 한다. 

가끔 글이 안 써지면 내 부족한 재능을 탓하면서 문학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온다. 글을 짓는 시간에 차라리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훨씬 더 유익할 텐데, 나는 왜 자폐식으로 스스로 방에 갇혀 투입과 산출이 전혀 맞지 않는 이 부조리한 짓에 매달려 낑낑댈까 하는 자괴감에 빠져든다. 

그런데 어느 아침에 한 죽음을 내가 우연히 목격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뭔가 긁적이고픈 요구를 느낀다. 그날 휴일의 한적함과 아침의 햇살과 지나가는 행인들과 뒤로 젖혀진 의자와 번개탄과 그리고 깊은 잠…. 참기 힘든 이질적인 조합으로 가득한 우리네 삶의 참담한 부조리를 목격할 때면, 난 아이러니하게도 글쓰기라는 부조리한 방식으로 생을 견디는 동시에 위로하고 싶다. 나를 비롯해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아질 거라고. 

그러고 보니 또 4월이다. 4년 전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침몰해 300여 명의 학생이 세상을 등진, 부조리의 극치가 발생한 그 달이 또 왔다. 너무 큰 부조리 앞에서 어떤 위로는 기만적인 행위 같다. 그래도 모순덩어리 이 세계에서 문학의 속성은 내가 나중에 다시 들여다봤던 유리창처럼 투명한 슬픔 같은 것, 그 빈자리의 서글픔을 향한 위로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먼저 가버린 사람들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의 책 한 구절을 들려주며 토닥여주고 싶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영원이라는 것을 무한한 시간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불교신문3385호/2018년4월18일자] 

김영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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