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따라 오르다 연화세계를 만나다

 

미리 그린 욕심의 그림

마음을 덜어 여백 남기니

새로운 것이 다가오네 

신문쟁이 사진기자로 지내면서 마음 한편에 독자들에게 미안스런 생각이 있다. 새로운 소식을 전해야 하는 뉴스의 기본 속성상, 계절을 알리는 소식은 항상 ‘설익은 밥상’을 차려 보여드리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잘 지은 밥상’을 차려볼 욕심에 지난 2일 구례 화엄사로 향했다. 

사진동호인들 사이에 탁월한 자태와 주변과의 조화로 봄철 최고의 매화로 치는 홍매화를 보기위해서다. 검은 색이 돈다고 할 정도의 진한 꽃의 색감 때문에 흑매로 불리기도 한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그날그날의 사진들을 일주일간 확인했다. 이틀 전에 만개에 근접했고 이후 비나 강풍은 없었다. 그 절정의 순간을 단박에 만나고 싶었다. 

구층암 천불보전 내부.

발길을 재촉해 오르는데 누군가 인사를 건넨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꽃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탱글탱글한 맛이 사라지고 꺾였다”고 알려준다. 계단을 올라 사찰의 중심영역으로 들어서니 화엄사를 대표하는 전각인 각황전 보다 그 옆에 있는 흑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러 번 왔던 화엄사지만 꽃이 피어있는 흑매를 만난 건 처음이다. 지금 모습으로도 너무 매력적이다. 각황전 뒤편에 올라 흑매를 바라보면 왼쪽으로 보이는 나한전, 원통전, 대웅전, 명부전의 처마와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오른편 각황전을 바라보는 듯하다.(사진 위) 

잘 늙은 웅장한 도량을 기품 있는 붉은색으로 장엄하고 있다. 누군가는 절정의 흑매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한 생각 바꿔보며 봄을 다시 찾아 올 것이고 또 다시 화엄사 흑매의 유혹에 빠져 들것이다. 더 기품 있고 화려한 흑매를 만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기에…. 

이번에는 화엄사 산내 암자인 길상암으로 향했다. 길상암 앞에는 야생매화가 있다. 어렴풋이 화엄사에 천연기념물 매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흑매를 본 사람들은 당연히 이 매화나무가 천연기념물인줄 알지만 화엄사 천연기념물은 길상암 야생매화다. 하얀 꽃을 피우며 꽃의 크기는 작지만 향기가 진해 여운이 길게 남는다. 기대와는 달리 매화의 꽃잎은 이미 흩날려 자취를 감췄다. 

구층암의 명물 모과나무기둥 .

아쉬움에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이번에는 길상암 바로 아래에 자리한 구층암이다. 화엄사 산내 암자 가운데 모과나무 기둥으로 인기가 높다. 불교건축을 넘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들에게 이 곳 모과나무 기둥은 이미 꼭 봐야할 명소다. 동행한 선배의 인연으로 구층암 주지 덕제스님과 차담을 나눌 수 있었다. ㄷ자 형상의 도량에서 터져 있는 자리에 차담을 위한 낮은 원두막이 있다. 이곳에서 도량을 바라보니 모과나무에 쏠려 있던 시선이 도량 전체로 자연스레 넓혀진다. 근데 ㄷ자 형상이긴 한데 전각과 전각이 정형화된 직각으로 만나지 않는 자유로운 배치다. 모과나무로 기둥을 삼은 것은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극락세계를 담고 있는 천불보전 전경

산내 암자이다 보니 문헌의 기록도 드물고, 체계적인 연구도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서 변변한 안내판도 제대로 없다. 그래서 뵌 김에 주지 스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원래 화엄사 일대에는 81암자가 있어 말 그대로 절골 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방화로 대부분 소실됐는데 구층암 또한 그러했고, 이후 재건되었다고 한다. 또한 구층암(九層庵)의 ‘구’를 단순한 숫자가 아닌 구성이나 완성의 의미로, 이는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천불보전에는 수많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용 봉황 토끼 거북 등 연화세계를 뛰노는 다양한 동물의 형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천불보전 자체가 극락정토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꽃길 따라 오른 길에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니 눈앞에 연화세계가 펼쳐졌다. 

수많은 연꽃으로 장엄되어 있는 천불보전 .

 

원두막에서 바라본 구층암.

[불교신문3383호/2018년4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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