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구산선문 ‘실상산문’ 활짝 문 열다

 

당나라서 16년 수행 후 귀국 
실상사 창건하며 토대 다져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
서당지장 제자…도의와 쌍벽  

“고요할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 골짜기가 응한다
무위, 다툼 없이 매우 수승”

몰념몰수(沒念沒修)…조사선 
즉심시불ㆍ본각(本覺)사상 입각
흥덕대왕 선강태자 적극 후원
제자 수철도 선풍 크게 진작해

구산선문 가운데 첫 선문인 실상산문이 열린 남원 실상사 전경.

 앞서 거론했지만, 신라 사회의 혼란스런 시기에 마침 당나라에서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내세운 선종이 최고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즉 755년 안록산의 난과 854년 무제의 회창파불을 계기로 당나라에서 교종은 급격히 퇴보한 반면 선종은 오히려 크게 발전되는 양상을 띠었다. 

조사선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당시 대표적인 선사는 석두 희천(700˜791년)과 마조 도일( 709˜798년)이다. 두 선사 가운데서도 마조선사와 마조계 제자들에 의해 선풍(禪風)이 큰 위세를 떨쳤다. 즉심시불(卽心是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강조하면서 인간 중심의 사상을 체계화한 조사선 선풍이었다. 지난호에서 언급한 가지산문(迦智山門)의 도의(道義, ?˜825년)선사가 마조문하에서 37년간 수행하고 신라 헌덕왕 때 귀국하면서 우리나라에 선(禪)을 전했으나 왕즉불(王卽佛)의 왕권 불교인 교종의 영향으로 선사상이 전개되지 못했다. 또한 당시 화엄사상과 화엄종의 영향으로 선에 대해 생소했던 신라 사회에 선이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랬던 신라사회가 수년이 지나 실상산문을 초두로 선종 산문이 개산되기 시작했다.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비문에 의하면 실상산문(實相山門)의 홍척(洪陟)선사는 당시 도의와 쌍벽을 이루었는데,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북산의’란 설악산 진전사에 은둔했던 도의선사를 두고 하는 말이고, ‘남악척’이란 당연히 홍척선사를 지칭한다. 홍척선사는 가지산문의 도의선사보다 몇 년 늦었지만, 가지산문보다 앞서서 실상산문을 개산했다. 곧 9산선문 가운데 최초로 연 선문이 실상산문이다. 

표현만 다를 뿐 도의선사 사상 

실상산문의 개조 홍척선사의 부도, ‘증각대사응요탑(보물 제38호)’.

홍척의 휘(諱)는 홍직(洪直)이다. 810년 헌덕왕 때에 당나라로 들어가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년)의 법을 받고 도의보다 5년 뒤인 826년 흥덕왕 때 귀국했다. 당나라에서 16년간 수행하고 돌아와 전북 남원 지리산에 실상사(원래 이름은 知實寺)를 창건했다. 

<경덕전등록> 권11에 ‘홍직선사의 법사(法嗣) 2인으로 흥덕대왕과 선강태자(宣康太子)’라는 기록이 전한다. 실제로 홍척은 흥덕대왕(826˜835년 재위)과 선강태자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지리산에서 선풍을 진작시킬 수 있었다. 왕실에서는 홍척선사에게 초청하는 편지를 자주 보내었다. 홍척선사가 왕실에 들어가면, 왕이 몸을 낮추어 예를 올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렇게 홍척은 왕실과 통로를 열었던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9산 선문 가운데 왕권과 가장 밀착한 산문이기도 하다. 묘한 점은 가지산문 도의선사는 선을 전개하지 못했는데, 실상산문의 홍척은 선을 전개하는데 어렵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 상황을 추측할 뿐이지만, 홍척선사와 시대가 시절인연이 맞았던 것으로 해석될 뿐이다. 

홍척은 830년 무렵, 지리산에서 머물다가 흥덕왕의 초청으로 경주로 옮겨갔다. 다시 836년 무렵 설악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홍척의 제자로는 편운(片雲)과 수철(秀澈) 등 1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시호는 증각(證覺)이며, 탑호는 응료(凝廖)이다. 홍척의 탑비는 현존하지 않고, 제자인 편운과 수철의 탑비만 전한다. 

홍척의 대표적인 선사상은 몰념몰수(沒念沒修)인데, 이 언구가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에 새겨져 있다. “그 종취(宗趣)를 비교해 살펴볼진댄, 곧 닦되 닦음이 없으며 증득하되 증득함이 없음이라. 고요할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 무위(無爲)의 이익됨은 다툼이 없이 매우 수승하다.”

가지산문 도의선사의 사상이 무념무수(無念無修)인데, 홍척은 몰념몰수를 말하고 있다. 언어적인 표현이 다를 뿐이지 도의와 홍척선사의 사상은 동일하다. 곧 두 선사가 모두 같은 스승인 서당 지장으로부터 법을 받기도 했지만, 도의와 홍척선사의 선사상은 조사선의 즉심시불, 본래성불인 본각사상에 입각해 있다. 

왕실 호응도 커…山門 번성 

홍척선사의 제자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홍척이 설악산에 머물 때, 수철(秀澈, 817˜893년)선사가 찾아왔다. 수철이 홍척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하여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에 홍척이 물었다. “자네는 어디서 오는 길인가?” 그러자 수철은 오히려 대답은 하지 않고, 스승에게 반문했다. “스승님의 본성(本性)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도를 네게 붙이는 것은 전생의 인연으로부터 온 것이니, 우리 서당 지장의 가문을 번성시키는 일은 이제 너에게 달렸다.”(심원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그런데 홍척과 수철의 선문답을 접하면서 4조 도신과 5조 홍인이 선문답이 오버랩 된다. 홍인이 7세에 도신에게 출가했다. 도신이 우연히 황매에 갔을 때, 한 소년을 만났는데 이 소년이 바로 홍인이다. 골상이 특이하고 어린 소년인데도 그의 사람됨이 보였다. 이에 4조 도신이 물었다. “네 성은 무엇이냐?” “성은 있으나 흔한 성이 아닙니다.” “그래 무슨 성이냐?” “저는 불성입니다.” 이렇게 답변한 홍인은 12세에 도신에게 인가를 받았다. 늘 큰스님들 일화를 접할 때마다 느끼지만, ‘역시 큰 그릇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수철선사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연허율사에게 출가했다. 이후 여러 곳을 행각하며 복천사 윤법에게 경전을 배웠고, 홍척선사 문하로 들어가 법을 받고 법맥을 이었다. 선사는 선(禪)과 교(敎)를 겸비했으며, 스승 홍척의 뒤를 이어 실상산문을 크게 일으켜 사부대중의 귀의를 받았다. 수철선사도 스승과 비슷하게 왕실의 귀의를 받았다. 경문왕(861~874년 재위)은 867년 수철선사를 궁궐로 초청해 법을 들었으며, 헌강왕(875˜880년 재위)도 스님을 존경해 선사를 양주 심원사에 머물도록 했다. 수철은 만년에 다시 실상사로 돌아가 제자들을 지도했다. 제자로는 음광(飮光) 등이 있으며, 탑호는 능가보월(楞伽寶月)이다.

실상산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왕실의 호응이다. 가지산문의 도의선사는 왕실의 호응 없이 배척받았던 반면 실상산문은 힘을 입었다. 원고를 쓰면서 자주 거론되는 부분이 승려와 왕권의 관계이다. 물론 이 점을 현대로 환언하면 정치와 종교 문제인데, 역사와 불교입장의 관점이 다르다. 무조건 승려들이 왕권의 힘을 받지 않았으며, 그 반대로 왕권에서 승려를 기용해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구하려고 했던 점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종교와 정치는 영원히 평행이 될 수 없지만, 불교가 정신적 지도자로서 왕에게 바른 길로 인도한 긍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다. 여기서는 이 점만 보기로 하자. 

의상대사가 671년(문무왕 11년)에 신라로 돌아왔을 때, 문무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주려고 하였는데 대사는 거절했다. 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려고 할 때, 의상대사는 중생들의 고난을 염려해 문무왕에게 반대하는 내용의 글을 올려서 토목공사를 중지토록 했다. 위진남북조 때는 나라가 주변 국가와 대치되는 상황에 큰스님을 모시고 있는 것 자체가 국권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 최고의 역경가인 구마라집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또 몽골 칭기즈칸의 책사는 선수행자였다. 그가 바로 요나라 사람인 거란족 야율초재(1190˜1244년)인데, 몽골의 잔인성을 잠재우고, 원나라가 성립되는데 국가적인 초석을 만든 인물이다. 칭기즈칸이 죽고 나서 2대 오고타이 시대까지 책사를 지냈다. 야율초재는 책사 이전에 조동종 <종용록>의 저자인 만송 행수(1166˜1246)의 제자였다. 27세에 만송 문하에 입문해 참선을 했고 법을 전수했다. 선종사에서는 그를 담연(湛然)거사라고 한다. 또 원나라 3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책사였던 유병충(1216~1274년)은 승려 출신이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황제가 되기 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쿠빌라이는 지략과 관용이 뛰어난 승려인 유병충을 기용했다. 이렇게 불교와 왕권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적지 않다. 

[불교신문3382호/2018년4월7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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