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율론 삼장에 정통 … 이사(理事)에 무애(無碍)한 대학자

 

동국대 첫 비구승 총장으로
정각원 경주 의대병원 설립
한국불교 최초 불교대사전
‘가사불교대사림’ 편찬 발원
올봄 17권 간행 앞두고 있어 

총무원장 당시 국제선센터
전법·템플스테이회관 건립 
교단 ‘결계와 포살’ 복원…
中 우민사엔 ‘구법기념비’ 
종조 도의국사 기록 정립

한국불교전통사상총서 원력 
한글 13권, 영역 13권 펴내 

대학자이자 율사로서 총무원장을 역임한 지관스님은 한국불교 최초의 대사전이라 할 수 있는 <가산불교대사림> 편찬 원력가로서도 널리 알려졌다.

가산당(伽山堂) 지관대종사(智冠大宗師, 1932~2012)는 대학자이며 율사이자 종무행정에 탁월한 선지식이다. 스님은 은사인 자은대율사(1911~1992)의 계맥을 전수했으며 운허대강백(1982~1980)문하에서 교학을 연찬, 운허스님의 강맥(講脈)을 이었다. 그런가하면 당대에 종무행정의 으뜸으로 꼽는 영암대종사(1907~1987)를 모시고 종무행정을 배우고 익혔다. 스님을 일컬어 삼장(경·율·론)에 정통하고 이사(理事, 이치와 일)에 무애(無碍)한 어른이라고 칭송하는 데는 이러한 세분의 스승을 모신데서 연유한다. 

당대에 각 분야에서 빼어난 어른 아래서 당신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 데다 스스로 타고 난 총명함에다 피나는 노력을 더해 일생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해인사 강주·주지, 해인총림 전계사, 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 총장 등 스님의 굵직한 행장에서 당신의 모습을 회상하게 된다. 지관스님의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빼어난 일은 <가사불교대사림(伽山佛敎大辭林)>의 발간이다. 이는 한국불교 최초의 대사전이요 우리 불교사에 영원히 기록될 대작불사이다. 

스님은 1982년 음력 5월11일 삼각산 경국사에서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리고 이 사전의 발간을 원만회향하겠다는 큰 원(願)을 밝혔다. “임술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집필, 한국불교대사전을 편찬하오니 천룡팔부 호법신장 옹호하옵고 시방삼세 부처님은 증명하소서/ 시작부터 마침까지 장애가 없고 문수보살 대지혜의 가피를 입어/ 어휘마다 부처님의 본의에 부합 하루 속히 완간하여 고불하리다/ 이 사전을 편찬하온 공덕으로써 한국불교 선양함에 도움이 되고/ 감로수를 마신 이는 모두가 이익 일체중생 빠짐없이 해탈하소서/ 저 자신이 임종할 때 병고가 없고 떠날 때를 미리 알아 앞이 밝으며 이 몸으로 항사세계 두루하여서 미진겁이 지나도록 도생하리다/ 나의 이름 듣는 이는 발심을 하고 나의 모양 보는 자는 낙을 얻으며/ 한 중생도 남아 있어 성불 못하면 영원토록 정각도를 취치 않으리/ 사전불사 뜻을 모아 동참한 자 중 집필자나 후원자나 염려한 사람 모두 함께 열반상에 높이 앉아서 중생 위해 열반가를 제창하리라.”(가산불교대사림 편찬 발원문) 

이 발원문은 스님이 10여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1982년(임술년) 첫 집필하면서 당신의 대원을 밝힌 글이다. 총 22권(본권20, 색인2)으로 계획된 이 사전은 2018년 봄 17권이 나올 예정이다. 사전 편찬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완간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 문도와 가산불교문화원의 사전 편찬 실무진들은 스님의 뜻을 받들어 완간에 힘을 쏟고 있다. 

지관대종사는 1932년 음력 5월11일 경북 영일군 청하면 유계리(柳溪里) 678번지에서 경주 이씨 규백(圭白)옹과 김녕 김씨 선이(先伊)여사의 3남3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해분(海分)이다. 지관은 법명이고 가산은 법호이다. 1937년 고향 인근 법성사에서 ‘옴 마니 반메 훔’기도로 아픈 몸을 치유하는 가피를 입었다. 1947년 16세 때 해인사로 입산 출가하여 자운대율사를 은사로 사미계를 받아 지녔다. 1949년 스승을 따라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고 1950년 19세 때 울릉도 성인봉 토굴에서 수행정진 후 보경사 용화선원에서 정진했다. 

1953년 통도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아 지니고 스승인 자운스님에게 율학을 배웠다. 1957년 해인사 강원에서 정화 이후 초대 강주인 운허스님 문하에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59년 통도사 강원에서 운허스님 지도로 수의과(隨意科)를 졸업한 이후 10여년 교학을 연찬했다. 이해 표충사 강사로 취임. 1960년 동화사·해인사 강주를 맡아 숱한 이력종장(履歷宗匠)들을 길러냈다. 1963년 해인대학(현 경남대)을 졸업했다. 1965년 34세에 중앙종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68년 동국학원 이사 조계종 종전(宗典)편찬위원에 위촉됐다. 1969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해인사 주지에 취임, 대적광전을 중수하고 사적비를 일주문 근처에 있는 해인사 3층 길상탑 옆에 건립했다. 같은 해 동국학원 감사, 종단 교육위원·역경위원에 선출됐다. 

1972년 41세 때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종회부의장, 동국학원 이사에 선출됐다. 1975년 동국대 불교대 승가학과(현 선학과) 교수로 취임, 1976년 동국대에서 ‘남북전육부 율장비교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 동국대 정각원장, 경국사 주지, 1980년 동국대 불교대학장, 1982년 ‘가산불교대사림’ 발간 발원기도 후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1984년 동국대 교육대학원장을 거쳐 1986년 동국대 제11대 총장으로 추대됐다. 스님 나이 55세이며 비구승으로서는 동국대 첫 총장이 됐다. 총장 재직 시 재향군인회관 대지를 매입하고 경주캠퍼스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설립, 포항 기독교병원을 매입했다. 1987년 문화재위원, 1989년 동국대(경주) 정각원을 창건. 1991년(60세) 사단법인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개원, 사전편찬을 법인의 주요사업으로 추진, 소장 연구자 육성을 위해 가산상(伽山賞)을 제정하고 학술전문지 <가산학보(伽山學報)>를 창간했다. 1993년 해인사 주지 재임, 1998년 자운대율사 부도탑과 비를 세웠다. 해인총림 서당(西堂)에 취임하고 해인사 전계대화상으로 추대됐다. 

2001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됐으며 2003년 대각회 이사장·동국역경후원회 이사장에 선출됐다. 2004년 대종사 법계를 받고 2005년 제32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해 국제선센터, 조계사 시민선원, 조계사 일주문, 전법회관·템플스테이회관을 건립했으며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회장,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 해인총림 전계사로 추대됐으며 2007년에는 단절된 교단의 결계(結界)와 포살 제도를 복원하여 계율준수를 수행과 포교의 근간으로 삼았다. 

2008년 서울시청 광장에서 범불교도대회를 개최. 중국 남창 우민사에 도의국사 입당구법(入唐求法) 기념비를 건립하여 조계종단 종조(宗祖)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확실하게 정립했다. 2009년 조계종총본산 조계사에 10층 사리탑과 사적비를 건립하여 총본산의 역사적 의미를 재정비했다. 2011년 가산불교연구원 연구진에게 대사림 완간을 위해 합심하여 정진하라는 간곡한 유촉을 글로 남겼다.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한 <한국불교전통사상총서>를 발간 원력을 세워 2011년 한글역 13권, 2018년 영역 13권을 펴냈다. 2012년 1월2일 서울 경국사에서 법랍 66년 세수 만80세로 원적에 들었다. 

스님은 입적 전 2011년 9월 이승을 떠날 때를 예견한 듯 ‘사세(辭世)를 앞두고’라는 시를 남겼다.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 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 팔십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無常肉身 開蓮花於娑婆 幻化空身 顯法身於寂滅 八十年前 渠是我 八十年後 我是渠)” 

스님의 장례는 해인사에서 종단장으로 1월6일 거행됐다. 

문도들은 2017년 스님 열반 5주기에 탑·비를 세웠다.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비 옆에 터를 잡아 세운 전불심등(傳佛心燈) 부종수교(扶宗樹敎) 삼장원통(三藏圓通) 정혜원명(定慧圓明) 가산당(伽山堂) 지관대종사(智冠大宗師) 비(碑)의 글은 시인 고은이 짓고 서예가 송천 정하건이 썼다. 논설위원

근검절약 일상…숱한 저술 남겨

지관스님은 평생토록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촌음(寸陰)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다. 일상생활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으며 대중의 어른이면서도 항상 대중과 함께 했다.

스님의 솔선수범과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철저한 절제 정신은 후학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후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라와 국민은 가난에 찌들어 힘겹게 살 때다. 산골 절 해인사에는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었고 양초도 귀할 때였다. 대중이 잠든 시간에 책을 보려면 호롱불을 켜야 했다. 그 호롱불도 기름을 아껴 써야 하는 형편이라 취침시간에 공부하려고 불 켜는 호롱의 기름은 쓰는 사람이 그 값을 내야했다. 

스님은 밤늦게 불 켠 것을 바깥에서는 알지 못하게 담요 두어 개로 창문을 가리고 공부했다. 그리고 나서 자정이 지나면 법당에 가서 절을 했다. 절하는 데는 불을 켜지 않아도 되니까 캄캄한데서 향만 태우고 백팔참회를 했다. 

대중 운력 때도 누구보다 스님이 먼저 나와 있었다. 출장비로 받아간 돈도 지출명세를 분명히 하고 남은 돈은 사중에 반납했다. 책을 보다가도 손님이 오면 보던 책을 덮고 손님과 면담이 끝나면 다시 책을 펼쳤다. 잠은 언제 자는 지도 모를 정도로 시간을 아껴 썼다. 스님은 여러 소임을 보면서도 끊임없는 향학열의 결과물로 숱한 저술을 남겼다. 

치문사기·사집사기(1963) 능엄경 약해(1967) 한국불교 소의경전연구(1969) 남북전육부 율장비교연구(1975) 비구니 계율연구(1976) 교감역주(校勘譯註) 역대고승 비문 6권(1990) 가야산 해인사지(1992) 화갑기념논총 한국불교문화사상사 상·하(1992) 한국고승비문총집:조선조~근현대(2000) 한국불교계율전통(2005) 범망경보살계 포살본(2007) 등이다.  

■ 도움말 : 세민스님(지관문도회 대표) 종성스님(해인사 홍제암) 
법혜스님(대구 대각사) 혜총스님(부산 감로사) 
■ 자    료 : 가산당 지관대종사 탑·비 건립사업보고서(건립위원회刊)

[불교신문3380호/2018년3월31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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