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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⑤논산 관촉사 - 고려광종 왕권 강화 차원 건립부국 건설 염원 안고 황산벌 바라보는 은진미륵

호족 개국공신 등 기득권 배격
새 인물, 소외받던 세력과 연계
관촉사는 왕실 주도 개혁 산물
계율 예참 중시 미륵신앙 반영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이 지난 2월13일 국보로 지정 예고됐다.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관촉사 미륵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세를 타는 불상이다. 국보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고 특별한 불상이다. 은진미륵은 남다르다. 우선 규모가 장대하다. 현재 전해오는 석불 중에서 가장 높은 18.12미터이고 둘레는 9.9미터, 무게가 377톤이다. 

생김새도 웅장하다. 이목구비가 멀리서도 드러날 정도로 뚜렷하고 압도적이다. 파격과 대범 독창성을 갖춰 국보로 전혀 손색이 없다. 이 미륵불을 보기 위해 예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렸다. 경주가 학생들의 수학여행지이며 신혼여행지 였 듯이 은진미륵은 늘 수학여행단과 관광객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별한 불상 ‘은진미륵’

관촉사 은진미륵

국보지정 소식을 듣고 지난 2월 19일 관촉사를 찾았다. 보물 제218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있었다. 설 연휴가 막 끝난 평일의 관촉사는 고요하면서도 활기가 있었다. 조용히 절하는 기도객과 사진을 찍기 위해 분주히 오가는 관광객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석불 옆으로 난 계단 위에 올라서자 넓은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평야가 끝없이 펼쳐졌다. 언덕위에 자리한 관촉사는 어느 높은 산 못지 않게 높이 자리했다. 미륵불이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들판 어디에서든 바라보면 불상이 보였을 것이다. 그 효과를 노려 평야 위 언덕에 이토록 웅장하고 큰 불상을 조성했는지 모른다.

관촉사와 불상을 만든 주인공은 고려 광종이다. 2년 전 젊은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던 사극 드라마 ‘달의연인- 보보경심 려’에서 이준기가 역을 맡았던 4왕자 왕소가 바로 광종이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추진하고 고려 기틀을 다진 개혁가이면서 그 과정에서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폭군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고려사>는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忠良)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여 감옥이 항상 가득 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광종은 폭군이 아니다. 천년 왕국으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악역을 맡은 것 뿐이다. 조선의 태종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튼튼한 기반 위에 세종과 같은 성군이 나왔 듯 광종 역시 왕조 초기 혼란을 잠재우고 안정적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호족연합체였다. 신라 후기에 들면 왕권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지방 호족이 활거 한다. 왕건은 결혼으로 지역 호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부인이 무려 29명에 이른다. 

왕건 사후(死後) 그 취약성이 여실히 드러났다. 왕건의 장남은 아버지를 이어 2대 왕에 올랐지만 2년도 못 채우고 병사했으며, 이복 형을 몰아내고 외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던 정종 역시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초기 혼란기에 4대 왕에 오른 광종 앞에 놓인 운명은 그의 형들처럼 죽느냐 아니면 강력한 개혁으로 새로운 고려를 건국하느냐는 둘 중 하나였다.

광종의 개혁 염원 담아

광종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왕족이라도 개혁에 맞서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호족 세력과 개국 공신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다. 새로운 세력은 소외 받거나 기득권과 거리가 먼 자들이다. 과거를 통해 들어온 유학자출신 관료들과

광종은 집권 초기 정치 안정에 힘썼다. 강력한 힘을 가진 호족에 맞서기 보다 우대했다. 자주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와 위엄을 보이고 경제제도를 정비했다. 중국과도 관계를 개선하였으며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고 백성들 지지를 받자 본격적으로 기득권의 특권을 제한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대상은 호족과 개국 공신들이었다. 

그 첫 조치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호족 공신들이 소유한 노비를 양민으로 풀어주어 그들의 경제 군사적 기반을 허무는 개혁정책이었다. 기득권의 경제 군사 기반을 허문 자리에 새로운 피가 수혈됐다.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했다. 여기에다 쌍기 등 중국에서 넘어 온 귀화파, 개경이 아닌 지방의 군소 호족들을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삼았다.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개혁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정권 안정을 도모한 광종은 눈을 지방으로 돌렸다.

관촉사 창건은 이처럼 광종의 개혁 정책에서 나왔다. 신진 인사 등용, 그동안 소외됐던 지역과의 연대, 지방으로 확장에서 나온 광종 개혁의 산물이 바로 관촉사와 미륵불이었다. 광종은 기득권자를 내친 자리에 과거를 통해 들어온 유학자와 중국의 귀화파에다 후백제 신라 등 그동안 소외된 지역 인사들을 중용했다. 논산은 백제와 후백제의 근거지였다. 넓고 기름진 평야에서 나오는 농산물에다 인접한 서해 바다에서 나오는 해산물로 이 지역은 지금도 가장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지리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전라도 지역에서 중부지방으로 나아가는 길목이며 중국으로 가는 통로다. 삼한(三韓)의 국운이 여기에서 결정됐다. 660년 백제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이 바로 논산이다. 논산의 옛 지명이 황산이다. 견훤이 왕위를 찬탈한 아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패 됐다가 왕건에게 도망친 후 최후의 격전을 벌였던 곳 역시 황산벌이니 논산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풍부한 물산에다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군대가 주둔할 만한 지역으로 꼽혔는데 아니나 다를 까 오늘날 육군훈련소가 관촉사 뒤에 자리하고 있다.

관촉사 창건을 묘사한 벽화

백제 우대 정책

후백제를 정벌하고 이 지역을 감시하기 위해 왕건은 개태사(開泰寺)를 세웠지만 그의 아들 광종은 후백제를 왕실의 새로운 우군으로 삼기위해 관촉사를 세웠다. 이미 광종은 후백제를 새로운 지지기반으로 삼기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정책이 법상종 우대였다. 고려는 선종과 손잡고 나라를 세웠다. 신라 말 도의국사에 의해 들어온 선은 호족의 적극적 지원 속에 고려를 건국하는 이념적 기반을 마련했다. 

나라를 세우는데는 필요한 이데올로기였지만 절대 권력을 부정하고 파격과 자유를 중시하는 선은 강력한 왕권 체계를 수립하려는 광종의 구미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법상종은 계율을 중시했다. 왕실 중심의 질서를 세우려는 광종에게 맞는 이념이었다. 또한 지방의 군소호족이 법상종을 신앙했다. 개경에 교종 계통의 귀법사를 창건한 까닭도 선종과의 거리두기였다. 계율과 예참을 중시하는 미륵상생신앙을 신봉하던 법상종의 본향(本鄕) 백제 본거지에 왕실이 나서 관촉사를 세운 것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담고 있다.

관촉사의 특성과 미륵불의 웅장함을 보더라도 국가 차원에서 이 절이 건립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중턱에 인공적으로 평지를 조성해서 만든 관촉사 석불 조성에만 동원된 인력이 100여명의 장인에 이르고 완공 까지 37년의 세월이 걸렸다. 53톤의 개심사 석탑을 만드는데 1만명의 인원이 동원된 것을 볼 때 그 10배가 넘는 관촉사 석불에 어느 정도 인력이 동원됐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석조불상을 조성해 관촉사로 옮기는데 만 1000여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이처럼 왕실 차원에서 모든 물자와 인력을 대고 총력을 기울여 조성한 역사가 지금도 남아 전해온다.

“광종 19년(968) 반야산 앞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산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울음소리가 나서 찾아가 보니, 갑자기 큰 바위가 솟아났다. 이를 관에 알렸더니 조정에서는 ‘큰 불상을 조성하라는 길조’라며 금강산에 있는 혜명대사를 불러 불상 조성을 명했다. 석공 100명을 거느리고 불사를 하던 혜명은 솟아나온 바위로 허리 아래 부분을 만들고, 가슴과 머리 부분은 12km 떨어진 연산면 고정리의 우도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 일꾼 1000명을 동원하여 옮겨왔다. 

하지만 이미 솟아 있는 바위가 하도 커 머리를 올릴 재간이 없어 근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부처를 모신다’고 하며 밑 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쌓아올려 덮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 다시 모래를 쌓은 후 맨 윗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비로소 크게 깨달아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

국가 차원에서 전 백성들의 염원을 안고 조성한 불상이어서 그런지 이후 신이(神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고려 중엽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입하는데 어떤 승려가 얕은 내를 건너듯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 거란군이 따라 건너다 거의 몰살당했다. 화가 난 거란 장군이 그 승려를 칼로 치니 갓 한 쪽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와 동시에 관촉사 미륵불의 갓 한쪽이 바위 위로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부분은 상하지도 않아 그대로 두었다가 조선 숙종대에 다시 붙여 달았다고 한다.

삼칠일간 서기 어려

미륵불은 고려 4대 광종 19년(968)에 시작해 37년 만인 7대 목종 9년(1006)에 완공한다. 찬란한 서기가 삼칠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으로 저자를 이룰 만큼 북적됐다고 한다. 또 머리의 화불(化佛)이 내는 황금빛이 하도 밝아 송나라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서 예배하면서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빛을 발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일본인들이 빛을 발하던 화불을 훔쳐가고 이마의 광명주를 깨트려뜨렸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될 무렵인 순종 3년 (1909), 일본 사람 셋이 불공을 드린다며 여러 날 절에서 묵다가 불상 위에 놓여있던 금동화불을 훔쳐가고 이마에 있던 광명주를 깨트리는 바람에 빛을 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계단을 따라 관촉사를 내려오는데 비가 보인다. 주차장 앞에도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지역 유지가 세운 비다. 두 대통령의 흔적이 남은 사찰은 흔치 않은데 이들도 관촉사가 나라의 명운을 담아 세운 국찰(國刹) 임을 알았을 까? 그들의 시대는 그러나 지금 적폐라는 이름으로 단죄당하고 있다. 

대통령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 경제개발, 민주화 여정을 쉼 없이 달려오는 동안 쌓인 오물을 걷어내는 중이다. 적폐청산이든 개혁이든 내용은 인물과 이념의 교체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자는 저항한다. 1천여 년 전의 광종시대와 다르지 않다. 보물로 지정된 지 55년 만에 국보로 승격되는 관촉사 미륵불상이 다시 빛을 발하여 이 나라를 지켜줄 수 있기를 염원했다.

논산=박부영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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