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는 오고감이 있다 한들 
보는 성품에는 오고감이 없어
어떤 인연에도 집착하지 않아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어 무명을 타파하면 주객으로 대립하는 온갖 개념이 사라지고 텅 빈 마음만 남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온갖 시비가 벌어지지만, 무명을 넘어서면 유(有)와 무(無)라는 상대적인 온갖 개념이 떨어지므로 텅 빈 마음에서는 유와 무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추구하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유와 무에 집착할 게 없어 그 깨달음조차 사라지는 자리가, 온갖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이며 온갖 번뇌가 사라진 ‘열반’입니다. 이 깨달음의 성품은 사물이 있든 없든 간에 그 자리를 집착이 없이 무심하게 지켜보고 알 뿐입니다.

원문번역: 문) 사물을 바로 볼 때 보는 가운데 사물이 있습니까? 답) 보는 가운데 사물을 내세워 집착하지 않는다. 문) 사물이 없음을 바로 볼 때 보는 가운데 사물이 없습니까? 답) 보는 가운데 사물이 없음을 내세워 집착하지 않는다. 문) 소리가 있을 때는 소리를 듣는 것이 있겠지만, 소리가 없을 때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답) 듣는다. 문) 소리가 있을 때 소리를 따라 듣는 것이 있겠지만, 소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답) 지금 말하는 ‘듣는 성품’은 소리가 있고 없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듣는 성품’이 영원하므로 소리가 있을 때도 듣고 소리가 없을 때도 듣기 때문이다. 문) 이렇게 듣는 자가 누구입니까? 답) ‘자신의 성품’이 듣는 것이며 또한 이를 일러 ‘분별이 없는 지혜로서 아는 앎이 듣는다’라고 한다. 

강설: 우리가 본다고 하면 보아야 할 어떤 대상이 있어서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경계를 보지 않을 때도 그것 역시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물을 대하지 않을 때 눈을 감고 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여기서 본다고 하는 것은 사물을 상대하고 안하는 그런 이치가 아닙니다. 사물이 있고 없는 유와 무의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경계를 바라보는 근본 성품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 성품에서 나오는 ‘보는 성품’은 영원하여 사물이 있을 때도 보고 없을 때도 보기 때문입니다. 

사물에는 오고 감이 있어도 ‘보는 성품’에는 오고 감이 없습니다. 보는 것, 느끼는 것, 아는 것 이런 육근의 작용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은 눈이 있어야 보고 혀가 있어야 맛을 보는데 그런 육근의 작용도 ‘본디 성품’이 밖으로 표출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육근의 작용 이전에 그것을 표출하는 어떤 바탕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참성품이라고 말하지, 이 자리를 벗어난 중생의 알음알이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사물을 볼 때 자신의 참성품이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그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물을 볼 때 사사로운 마음이 개입하여 분별하는 중생의 마음이 사라진 ‘텅 빈 부처님의 마음’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물이 없을 때도 이 성품이 그대로 지켜만 볼 뿐 ‘사물이 없다’는 생각조차 일으키지 않습니다. 눈을 떴을 때나 감았을 때도 사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수행자는 언제나 눈앞의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지켜보는 여여한 마음자리, 그 성품만을 챙길 뿐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보고 듣는 성품’은 걸림 없이 어떤 세상 인연에도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인연대로 따라 갈 뿐입니다. 보되 보는 바가 없고 들어도 듣는 바가 없는 이런 사람이 부처님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무심도인입니다. 무심도인에게는 분별이 없는 지혜로운 앎만 있을 뿐입니다.

눈을 뜨고 보았어도 본 것이 없고

온갖 소리 귓가에도 들은 것 없어

이 사람이 어리숙해 보이겠지만

세상살이 시비에서 벗어난 도인.

[불교신문3376호/2018년3월17일자] 

원순스님 송광사 인월암 삽화=손정은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