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공양을 하고 나면 자주 솔밭 길 산책을 나선다. 고려 말 이승휴 선생은 이곳에 살면서, 우리나라 삼대 사서(史書) 중 하나인 <제왕운기>를 지었다. 선생을 모신 동안사 사당 뒤로 해서 일주문까지의 명상길은 온전한 나만의 비밀스런 공간이다. 천은사 온 이후 이런저런 불사를 했지만, 옛날 나무꾼들이 다니던 길을 복원해 명상길을 낸 것이, 개인적으로는 맘에 드는 불사가 아니었나 싶다. 이곳 영동지방은 강원도이면서도 의외로 기온은 따뜻하다. 백두대간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가끔 폭설이나 강풍이 불어 피해가 있기도 하지만, 살아볼수록 매력이 많은 곳이다. 

산책길의 소나무들은 모두 금강송이다.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쭉 뻗은 자태를 보고 있으면, 마치 수많은 용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솔길 옆으로 이제 막 고개를 내미는 새싹들이 인사를 건넨다. 아마 지난 겨울 숲길을 오가는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함께 봄을 기다렸을 것이다. 언뜻 바람결에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지나간다. 천천히 그곳을 따라가 보니, 아! 어느새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남도 쪽에서는 벌써 봄꽃이 지천이라는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올해 첫 매화를 접하는 순간 지난 겨울의 유난히 혹독했던 추위와 고생했던 기억들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봄을 찾아 모름지기 동쪽을 향해 가지 말라(尋春莫須向東去), 너의 집 서쪽 뜰에 이미 눈을 뚫고 매화가 피었다(西園寒梅已破雪)’ 내 방 차실 벽에 붙여두고 늘 경책으로 삼고 있는 글이다. 여기에서 ‘봄’ 이란 수행자들에게는 얻고자 하는 절대 경지의 ‘깨달음’일 것이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중생들에게는 언제나 추구하는 ‘행복’ 일 것이다. 이 시는 결국 찾고자 하는 진리와 행복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네가 바로 부처인데 왜 그것을 모르고 먼 곳을 찾아다니는가? 사랑도 행복도 너의 마음속에 있다. 먼 곳에서 찾지 말라.”

[불교신문3376호/2018년3월17일자] 

동은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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