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이라서 그런지 한용운
박태원 최순우 이태준 김광섭
많은 문인들이 살았다…하지만

지금은 재력가들의 저택이 
많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그럴지라도 성북동에는 때맞춰 
심우장, 수연산방이 있어 좋다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게 자리를 지켜주는 
그리움이 나를 설레게 한다

지난 설 연휴에 심우장엘 다녀왔다. 심우장은 서울 혜화동에서 걸어가면 그리움이 지워지기 전에 당도하는 곳에 있다. 언덕배기 좁은 골목 군데군데 붙은 글귀를 읽으며 올라가다 문득 만나는 대문. 그곳은 만해가 지난 1933년부터 1944년 6월29일 입적할 때까지 기거하던 유택이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씨 분명타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만해스님의 시 ‘심우장’ 전문) 심우장 마당에 걸린 만해 한용운의 시조다. 만해는 주옥같은 작품을 여러 편 남겼으며 그의 시편들은 여전히 만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등에서 보듯 어렵지 않은 일상어를 활용하여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심우장에 머무는 동안 방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툇마루 아래 놓인 흰 고무신과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정갈하게 닦인 흰 고무신은 만해 입적 후 새로 마련해 두었겠지만, 이는 곧 만해의 모습이며 성품을 잘 나타내는 유품이라고 굳이 고집하고 싶다. 심우장은 주인을 닮아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욕심 없는 집이다. 남쪽을 바라보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는 이유로 북향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당 댓돌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산 곳곳에 집이 빽빽하게 들어와 그때의 모습은 아니겠으나, 만해가 편치 못한 마음으로 저 능선을 얼마나 오래도록 응시하였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겨울에도 군불을 때지 못하게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인지 겨울에도 방문을 모두 열어놓고.(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창호도 중간쯤 두 줄을 비우고 한지를 발랐다. 그래도 그날은 봄기운이 올라와 덜 쓸쓸해 보였다.

정초에 다녀간다는 표시로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휴대전화에 추억을 빼앗길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가지고 간 시조선집 <세상의 가장 안쪽>도 놔두고 오려 했지만 그것 또한 시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도로 가지고 왔다. 마당 구석구석을 거닐다 지붕에 수북이 쌓인 솔잎을 걷어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내려오다 잠시 쉼터에 들렀다. 그동안 못 보던 구보 박태원 집터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시간을 살지 않았지만, 심우장 지척에 살며 만해의 기상을 느꼈으리라. 

길 건너 <무서록>을 쓴 ‘이태준가’를 찾았다.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을 걸고 외증손녀가 운영한다는 찻집이다. 심우장과 달리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 손잡고 온 부부, 연인들, 외국인, 친구들끼리. 하지만 혼자 찾아가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고즈넉한 곳이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늦겨울 성곽은 <무서록>을 집필하던 이태준을 그려 보게 하였다. 아침마다 이를 닦으며 바라보던 성곽이 지금도 그대로이니 수연산방 담 너머 풍경이 <무서록>에서 막 뛰쳐나온 듯 낯설지 않다.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성북동. 그래서인지 한용운, 박태원, 최순우, 이태준, 김광섭 등 많은 문인들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재력가들의 집인 저택이 많은 동네로 알려져 있다. 그럴지라도 성북동에는 때맞춰 문을 열어놓는 심우장, 수연산방이 있어 좋다. 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게 자리를 지켜주는 그리움이 나를 늘 설레게 한다. 

[불교신문3375호/2018년3월14일자] 

김양희 시인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