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집착, 욕심 벗어던진 평화로운 세계

 

기원전 2세기 인도 탑에 조각
간다라시대 부처님 직접 등장
사라쌍수 아래 팔 베고 누워
열반에 든 석가모니불 표현

우리나라는 열반도 조성 대신
팔상도 중 한 장면으로 나타내

일본 금강봉사에 소장된 1086년작 열반도.

“2월15일 사라쌍수 아래에서 마지막 날을 맞이한 석가가 하루 밤낮에 걸쳐 설법을 하였다. 석가는 곧 열반에 들 터이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말에 시방세계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질문할 경황도 없이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이 슬픔 때문에 사라쌍수도 마치 학처럼 하얗게 바랬다.(<대반열반경> 서품 제1)”

인도 마가다국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인생무상을 깨닫고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 부처(Buddha, 覺者)가 된 석가모니. 이후 45년여 간 중생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도하며 교화를 펼친 석가모니, 그러나 그 역시 인간이었기에 죽음은 피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의 나이 여든 살, 바이샬리 근처 벨루바 마을에서 혹심한 더위로 몹시 앓으시다가 바이샬리를 떠나 파바라는 고을에 이르셨을 때 금세공장(金細工匠) 춘다가 올리는 공양을 드시고 다시 병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을 참으면서 쿠시나가라로 다시 길을 떠났다. 그곳에 도착하자 부처님은 “아난다여,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해 눕고 싶다. 저기 사라수 아래에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깔아 다오. 나는 오늘 밤 여기에서 열반에 들겠다”라고 말했다.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아난다에게 “아난다, 울지 말아라. 가까운 사람과 언젠가 한번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인연이다. 한 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평안히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죽음을 흔히 열반(涅槃, Nirvana)이라 부른다. 그러나 열반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이 아니다. 등불이 바람에 꺼지듯이 미혹(迷惑)이 사라진 상태, 미혹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이자 깨달음의 경지[菩提]를 완성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열반은 생명 또는 삶의 불길이 꺼진 상태가 아니라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 즉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자 영원한 평안과 완전한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번뇌에서 벗어난 열반은 일찍부터 불교의 목표이자 불교미술의 주요한 소재가 됐다.

중국 맘숙성 돈황 막고굴 제438굴에 그려진 열반도.

열반을 소재로 한 미술은 인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열반 도상은 인도의 고대 스투파(stupa, 塔)에서 볼 수 있는데, 기원전 2~1세기경에 조성된 스투파에는 사리(舍利)를 봉안하는 스투파와 입멸장소인 사라쌍수(紗羅雙樹) 등 상징을 통하여 석가의 열반을 묘사하였다. 이후 불상의 탄생지인 간다라에서는 상징이 아니라 직접 사라쌍수 아래 오른팔을 베고 누워 열반에 든 석가모니의 모습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2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의 석가열반상은 현존 최초의 열반상으로 알려져 있다. 간다라에서는 유체(遺體)의 운반을 비롯하여 납관(納棺), 다비(茶毘), 분사리(分舍利), 기탑(起塔) 등 열반과 관련된 도상들이 불전(佛傳)의 한 부분으로 다수 제작되었으나 점차 열반장면을 제외한 도상은 소멸되었다. 이후 굽타시대(4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이르면 아잔타석굴 제26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라쌍수 아래 오른팔을 베고 누운 석가와 그를 둘러싸고 슬픔에 잠긴 많은 제자 등 열반의 극적인 분위기를 표현한 거대한 열반상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열반도상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역으로 전래되었다. 서역에서는 최근 탈레반의 무차별 공격으로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Bamiyan) 석굴사원에 6~7세기의 열반도 벽화가 남아있으며, 쿠차(Kucha)의 키질석굴(제38굴, 47굴, 48굴, 60굴, 69굴 등), 돈황석굴(제148굴, 158굴, 295굴, 280굴, 120굴 등)에도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든 석가모니와 이를 슬퍼하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열반도가 다수 그려졌다. 특히 키질석굴에는 한줄기 빛도 없는 컴컴한 석굴 뒤쪽에 열반에 든 석가모니와 석가모니의 열반을 슬퍼하는 제자들과 보살 등이 침통한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이것은 정문입구 윗벽에 그려진 도솔천 미륵보살설법도와 서로 마주보고 있어, 석가모니의 열반이 죽음이 아니라 미래부처인 미륵으로 이어진다는 불법(佛法)의 영원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로 부조상(浮彫像)으로 제작된 인도의 열반도나 벽화로 제작된 실크로드의 열반도와는 달리,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10세기 이후 탱화(幀畵) 형태의 열반도가 유행하였다. 이러한 열반도는 크게 열반의 주제를 단독으로 그린 열반도와 입열반(入涅槃)의 장면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열반 전후의 몇 가지 사건을 그려 넣은 열반변상도(涅槃變相圖), 중심에 입열반의 장면을 그리고 그 주위에 석가의 일생 가운데 주요사건 일곱 가지를 표현한 팔상열반도(八相涅槃圖)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독의 열반 주제를 예배대상으로 다룬 열반도는 석가모니가 양 손을 몸체에 붙이고 몸을 곧게 편 상태로 누운 것과, <불반니환경(佛般泥洹經)>에 표현된 부처의 자세인 오른팔을 베고 오른쪽 옆으로 누워 양 무릎을 구부리고 양발을 겹치게 한 것 등 다시 두 가지 형식으로 표현된다.

열반도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중국 남송대의 화가 육신충(陸信忠)이 그린 열반도이다. 두 그루의 사라쌍수와 부처님이 오른팔을 베고 누워계신 침상 주위로 피어오르는 서운(瑞雲), 그 앞에서 춤을 추는 2명의 인물들, 침상 주위에 둘러서 비통해하는 10대 제자, 석가의 열반소식을 듣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야부인 일행 등 부처님 열반의 극적인 순간을 아름다운 채색과 짜임새 있는 구도로 잘 표현한 육신충의 열반도는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열반도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때마침 유행한 말법(末法)사상 및 정토신앙과 결부되어, 헤이안시대(794~1184)와 카마쿠라시대(1184~1333) 이후 다양한 열반도가 조성되었다. 일본 최고(最古)의 열반도인 고야산 금강봉사(金剛峰寺)소장의 열반도(1086년)를 비롯하여 정교사(淨敎寺)소장 열반도, 교토 지은원(知恩院)소장 열반도, 최교사(最敎寺)소장 열반도 등이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1775년에 조성된 양산 통도사 소장 팔상도 중 쌍림열반.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의 열반의 순간만을 주제로 한 열반도는 거의 유행하지 않았다. 반면 팔상도(八相圖) 중의 한 장면인 쌍림열반도(雙林涅槃圖)가 주로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1447년에 간행된 <석보상절(釋譜詳節)>에 수록된 쌍림열반도, 이를 그대로 계승한 용문사 팔상도(1709년) 중 쌍림열반도는 육신충의 열반도처럼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든 부처님과 그를 둘러싸고 슬퍼하는 제자만을 그린 간단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부처님이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하자 그 소식을 듣고 온 제자와 대중들이 모여 슬퍼하는 장면[雙林涅槃]을 비롯하여 열반소식을 들은 마야부인이 내려와 석가를 만나는 장면[佛母散華], 금관(金棺)이 스스로 솟아 구시나가라성을 돌고 다비처소(茶毘處所)에 내리는 장면[金官自擧], 부처님의 열반을 보지 못한 가섭이 뒤늦게 도착하자 부처님이 금관 밖으로 발을 내미는 장면[佛現雙足], 관에 불을 지폈으나 붙지 않고 관에서 저절로 불이 올라와 타는 장면[凡火不燃, 聖火自焚], 관을 다비(茶毘)하고 사리(舍利)가 나오자 사리를 나눠 갖는 장면[均分舍利] 등이 한 화면에 묘사되어 있어 부처님의 열반을 전후한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육신은 비록 죽어 없어지지만 진정 삶의 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이 완성되는 순간이자 모든 미혹과 집착이 사라진 열반은 모든 불제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였다. 석가모니가 열반을 통하여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갈등과 집착, 욕심을 벗어던진 평화로운 세계, 그것이 곧 열반의 참된 의미이자 열반도의 조성목적이 아니었을까.

[불교신문3375호/2018년3월14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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