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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정] 현대판 김교각 스님을 기다리며
  • 묘장스님 논설위원·조계종사회복지재단상임이사
  • 승인 2018.03.0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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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스님들 국제구호 나서
일본에서 활약했던 행기스님과
중국에서 추앙받았던 교각스님
오늘날의 국제구호 활동가 모습
해외활동 동참 스님들 많아지길

한국은 전쟁 후 모든 기간 시설이 무너지고 헐벗어 국제 원조로 간신히 버티던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러나 고난을 딛고 일어나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다. 이는 세계에어 유일한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 중에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고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래서 유엔의 국제기구들은 한국을 가장 모범 국가로 삼고 도움을 받는 나라가 갈 길로 제시한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빈곤 상태를 벗어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정치 민주화를 달성하기는 더더욱 힘겨운 과제다. 국민들의 자각과 동참이 뒤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목표다. 그 어려운 일을 한국국민들은 해냈다. 그리고 다른 나라를 돕는 선진국이 됐다. 그 대열에 불교계도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래전 이 땅의 고대국가들은 해외구호를 했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주로 스님들이 그 활동을 펼쳤다. 일본에서는 백제왕 후손인 행기스님이 활약했다. 열다섯살에 출가하여 나라 야쿠시지(奈良 藥師寺)에서 신라승 혜기(慧基)와 백제계 의연(義淵)스님에게서 불도를 닦았으며 스물네 살에 덕광법사(德光法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745년에 대승정 자리에 오른 일본의 고승인 행기스님은 이타행(利他行)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조정의 두 번에 걸친 대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30대부터 사회 구제사업에 뛰어들어 저수지를 만들고 다리를 놓으며 빈민 구제활동에 앞장섰다. 

행기스님은 평생 일본 전역에 49곳의 사원을 짓고 제방 15곳, 연못 15개, 개천 7개, 수로 4개, 송수관 3개, 도로 1개, 항구 2곳, 다리 6곳, 빈곤자를 위한 숙박시설 9개 등을 설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나가와현 자마시에 있는 성곡사도 행기스님이 창건한 절 가운데 하나다. 전형적인 국제개발 현장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해야만 했던 그 당시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에는 지장보살의 후신으로 추앙받는 김교각 스님이 있었다. 김교각 스님(697-796) 은 신라 33대 성덕왕의 큰아들로 태어난 왕자였다. 24세 때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우고 출가하였으며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백토를 먹으며 중생구제와 수행을 한 끝에 지장보살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중국에 갈 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볍씨와 금지차 씨앗 등을 가지고 갔으며, 중국 각지를 돌며 구도생활을 하다가 양자강 남쪽 구화산에 화성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폈다. 생활이 어려운 중생들을 위해 직접 여러 농법을 개발하여 수많은 농민들을 피폐적인 고난의 생활에서 구제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이 땅의 스님들은 헌신적인 국제개발구호활동을 펼쳤다. 현재 해외에 지부를 갖고 있는 한국의 구호단체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규모면에서 불교계 단체는 아직 부족한 점이 있지만, 가치 있고 목적에 충실한 사업 부분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해외에 파견되는 스님들 숫자도 조금씩 늘고 있다. 반면 해외 활동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젊은이들의 동참은 조금씩 줄고 있다. 해외의 어려운 여건이 젊은이들을 주저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 스님들이 원력을 세워 해외 현장에서 활동하면, 현대판 행기스님과 김교각스님이 탄생할 것이다. 

[불교신문3374호/2018년3월10일자] 

묘장스님 논설위원·조계종사회복지재단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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