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불기 2562 (2018).9.25 화

사이드바 열기
상단여백
HOME 수행&신행 수행&법문 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조계종 원로의원 법융스님“수행은 부처되는 길이요, 포교는 부처님 은혜 갚는 길”
조계종 원로의원 법융스님은 불교가 사회적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수행과 포교에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욕심을 없애고 무심을 이뤄 성불하는 길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며, 포교는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스님과 불자들에게 당부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고
불자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

종교계가 직면한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
불교가 신뢰를 얻는 길은
수행과 포교에 있다“

조계종 원로의원 법융스님은 법호인 지하스님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평소 언론에서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스님이기에 인터뷰 약속을 잡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스님과 연락이 닿았다. 법융스님은 최근 감기로 몸이 좋지 않다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하지만 종단 원로로 법을 청할 기회가 많지 않은 스님이기에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인터뷰가 갖는 취지를 상세히 설명하며 거듭 기회를 청했다. 그러자 “그럼, 절로 찾아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스님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지난 2월27일 인천 법융사로 향했다.

법융사(法融寺)는 인천 연수구 동춘동에 위치한 사찰이다. 차에 내려 좁은 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작은 사찰이지만 법융사에는 부처님 법이 융성하기를 바라는 스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 멀리 내려다보이던 바다는 매입됐고, 주변은 도시 개발로 아파트촌으로 변했다. 개발 광풍 속에서 강제 수용될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스님은 법융사를 지켜냈다. 스님은 약속이나 법문 일정이 아니면 주로 법융사에서 머문다. 이곳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며 일과를 보내고 있다.

인사를 건네는 스님의 목소리는 감기로 잠겨 있었다. 건강이 염려돼 안부를 물었다. “감기로 좀 불편할 뿐, 크게 아픈 곳은 없습니다. 차 한 잔 하시죠.” 법융스님에게 스님에게 불자 인구 감소 문제와 불교 발전에 대한 방도를 청했다. 법융스님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또렷했다. 차분하고 힘이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스님은 “종교인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고 말했다. 짧고 간명한 답이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종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과거에 비해 종교인의 수가 줄고, 불교인의 수가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대응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계가 직면한 현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로부터 불자들로부터 외면 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나가야 합니다.”

불교가 사회적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길을 다시 청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역시 간단했다. “수행과 포교”가 바로 스님이 제시한 답이었다. 법융스님은 우선 ‘불교 수행’의 힘을 강조했다. 양극화와 청년실업, 우울증, 스트레스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불교 수행에서 찾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

스님은 “불교가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수행이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불교 수행은 말 없는 속에서 중생들을 제도해왔다”며 “서양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병원에서도 불교수행을 활용한 명상과 마음치유로 환자들을 치유하고 있다. 불교 역시 이를 알고 수행에 대해 연구, 발전시켜왔다”고 말했다.

종단 주요 소임을 두루 지내며 중앙종회 안정과 종단 발전에 기여했던 법융스님. 스님이 서울 생활을 접고 선원으로 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법융스님은 중앙종회의 산 증인이다. 종회 다선 의원으로 중앙종회가 입법기관인 동시에 종무행정 견제기관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졌다. 12대, 13대 두 차례나 중앙종회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스님은 13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마치고 선방으로 향했다. 문경 봉암사에서 3년, 수덕사 선원인 정혜사에서 3년, 그렇게 6년을 하루 10시간씩 참선 정진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절 집안 말로 선방에 복이 있다는 이야기처럼 선방 살아보니 정말 복이 있습니다. 탐(貪)·진(瞋)·치(癡) 삼독을 없애고 마음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돌아가는 길이 곧 수행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표도 여기에 있습니다. 욕심을 없애고 무심을 이뤄 성불하는 길이 곧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욕심이 심해지면 중생으로 기우는 것이고, 욕심이 없어지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어 스님은 포교에 대해 말을 이어나갔다. 수행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면 포교는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법융스님은 “평소 법문을 다닐 때 불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 주변부터 포교하라는 것이다. 불자들은 포교를 스님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일이 많다. 스님들은 물론이고 불자들도 포교에 나서야 한다”며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상좌변삼천(身爲狀座遍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라고 했다.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포교하지 않는다면 부처님 제자로서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고 당부했다.

“이제, 그만합시다.” 스님의 법문을 듣다보니 어느덧 1시간이 넘었다. 스님과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시 법융스님과 경내를 돌아봤다. 그리고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사찰을 나섰다.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법융스님이 당부한 “수행과 포교”의 가르침이 다시금 크게 느껴졌다.

■ 행정과 수행…이사(理事)를 겸비한 선지식
주요 소임 두루 거치며 종단 발전에 기여

법융스님의 이력을 한마디로 관통하는 단어는 ‘이사(理事)를 겸비한 선지식’이라는 점이다. 종회의원으로서 행정력으로 발휘하며 종단 발전에 앞장서기도 했으며, 종단 소임을 내려놓고 선원에서 치열한 정진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법융스님은 추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지난 1960년 7월 법주사에서 추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지난 1970년 4월 통도사에서 월하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3년 종비생 1기로 선발된 법융스님은 법주사승가대학과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75년 공군 군승으로 전역한 이후 남원 실상사 주지, 쌍계총림 쌍계사 주지, 서울 개운사 주지, 동두천 자재암 주지 등을 역임하며 행정력을 인정받았다.

또 법융스님은 중앙종회 사무국장 소임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종단 입법부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종단 행정에 기여함으로 종단을 위해 봉사하고 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원력 때문이었다. 행정 경험이 수행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스님은 5대 중앙종회의원을 시작으로 6대, 7대, 9대, 10대, 11대, 12대 중앙종회의원을 지냈다. 9대에는 종회 부의장을, 12대와 13대에는 종회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6년에는 중앙승가대학교 총장을 맡아 중앙승가대 정규대학 승격과 대학원 설립준비, 학과증설 등을 교육 불사에 대한 원력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스님은 승가대 이전 신축불사가 원만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96년에는 한중일 불교우호교류회의 서울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대회가 내실있고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도록 기여하기도 했다.

종단 주요 소임을 두루 거쳤던 법융스님은 제13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마무리하고 종비생으로 선발돼 상경한지 40년 만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문경 봉암사로 향했다. 종회의원으로서 종단 발전에 기여한 만큼 남은 기간 수행자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스님은 문경 봉암사와 수덕사 선원인 정혜사에서 각각 3년씩 치열하게 정진했다.

인천=엄태규 기자  사진 신재호 기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천=엄태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뉴스
여백
여백
여백
여백
icon
"SNS에서도 불교신문
뉴스를 받아보세요"

kakaostory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