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범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걸작

1222년 주조된 변산 청림사종
역동적이고 섬세한 용뉴 조각
상하대 연당초문과 연봉우리
연화 대좌 위 고부조 삼존상 등
화려함까지 갖춘 뛰어난 성보

고려 장인 한중서에 의해 제작
흠 없이 완벽한 주조술 돋보여

보물 277호 부안 내소사 종 명문에 따르면 고려 1222년 변산 청림사에서 주조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후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범종 가운데 양식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이 바로 이번 호에 소개될 부안 내소사(來蘇寺) 종이다. 총 높이 105.3cm에 이르는 고려후기 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로서 현재 내소사의 범종각에 걸려 있다. 어느 한곳 부족함 없이 완벽한 주조 기술은 물론이고 용뉴부터 상, 하대의 세부 문양과 종신의 삼존상까지 화려함을 갖췄다.

이러한 걸작을 주조한 제작자는 바로 한중서(韓冲敍)란 장인이다. 한중서가 제작한 작품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것이 금고 3점과 범종 2점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제작 기술을 통해 이보다 훨씬 많은 양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아있는 작품의 제작시기를 통해 13세기 전반부터 중엽까지 활발한 주조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중서는 처음에 도쿄(東京)국립박물관 소장 고령사(高嶺寺) 반자를 만들 당시에는 시위군의 일개 군사(侍衛軍 仲叙)에서 출발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군역에 종사하면서 이 반자를 만들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한중서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 작품이 바로 이 내소사 범종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직급 없이 장 한중서(匠 韓冲敍)로만 기록되었다. 그리고 16년 이후에 만들어진 1238년의 무술년(戊戌年) 신룡사(神龍寺) 소종(小鐘)을 만들었을 때는 이름 앞에 대장(大匠)으로 그 직위가 격상되었지만 아직 아무런 관계(官階)는 기록하지 않았다.

다시 같은 해에 복천사(福泉寺) 반자를 만들 때는 처음으로 별장동정(別將同正 韓仲叙)이라는 무산계(武散系)의 동정직(同正職)을 제수 받아 관장(官匠)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된 고려시대의 별장(別將)은 경군(京軍)이나 주진군(州鎭軍) 및 각 령(領)에 소속된 군관(軍官)의 직명으로 정7품의 하급 장교를 칭한다. 여기에 함께 사용된 동정(同正)은 정직에 준하여 설정된 산직(散職)의 하나로서 대체로 한직(閉職) 및 초입 임직의 성격을 띠어 대기하였다가 규정에 따라 실직으로 진출하였고 17~25결의 토지를 취득할 수 있었다.

내소사종의 용뉴.

이처럼 한중서는 관장으로서 무산계 정7품인 별장으로 진급하였으나 장인이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정직이 아닌 일종의 별정직인 동정직((同正職)을 수여받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만들어진 임자(壬子) 옥천사(玉泉寺) 반자에도 계속 별정동정 한중서(別將同正 韓仲叙)라는 관계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중서는 1218년 수녕궁주방(壽寧宮主房)의 시위군사(侍衛軍士)에서 출발해 1222년 내소사종(匠), 1238년의 신룡사 종(大匠), 1238년 복천사 반자(別將同正), 1252년 임자 옥천사 반자(別將同正)으로 승진을 해 나간 당시 고려시대 장인의 행적이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한중서는 옥천사 소장 안양사(安養社) 반자에 보이는 ‘경사공인지가(京師工人之家)’란 명문의 내용처럼 개경(開京)에 속한 사장 집단 출신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장 집단 출신이면서 사찰의 불교공예품을 주로 제작하였던 한중서는 군역을 마친 이후 본격적인 장인 활동을 하게 되면서 1238년 국가적 대우를 받는 관장으로 제수 받게 되었다. 다시 1252년에 이르러서는 지리산의 안양사 결사(安養社結社)라는 신앙결사를 위해 국가의 최고 권력층이 참여하여 만든 직경 55cm에 이르는 고려시대 후기 최고 걸작인 안양사 반자를 만들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후의 활동은 파악하기 힘들지만 한중서가 처음 고령사 반자를 만들 당시를 20대 초로 보아도 안양사 반자를 만든 시기가 50세 후반에 해당되는 점에서 약 30년 넘게 주조 활동을 이어온 걸출한 장인이었음이 확인된다.

내소사 종의 형태는 다른 종과 비교해도 역동적이고 매우 섬세하게 조각된 용뉴가 단연 뛰어나다. 앞서 소개한 1216년의 오어사(吾魚寺) 종의 용뉴가 고려 후기 범종 용뉴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서막이었다면 이 종의 용뉴는 그 완성을 이룬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용은 얼굴을 들어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크게 벌린 입 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과 혀 위에 올려진 둥근 보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오른 발은 천판 위에 살짝 들어 움켜쥐려는 듯 하며 왼발은 머리 위로 들린 채 날카로운 발톱 앞쪽으로 보주가 올려 있다. S자형으로 굴곡을 이룬 목에는 비늘과 갈기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었고 목 뒤로는 3단으로 나눈 원통형의 음통이 연결되었다. 음통에는 화려한 연당초문을 입체감 있게 장식하였다. 이 음통과 연결되도록 발 뒤쪽에서 솟아난 두 줄의 장식(焰翼)이 첨가되었는데, 역시 오어사종의 장식보다 훨씬 두드러진 모습이다.

아울러 음통 상단을 둥글게 돌아가며 부착된 여러 개의 보주가 더욱 크고 강조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고려 후기 종에 반드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천판 외연에 둘러진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는 높게 돌출되고 각 연판 안으로 꽃술 장식이 첨가되는 등 더욱 화려함이 부각되었다. 또한 상대와 하대에는 유려한 연당초문과 폭이 좁아진 연곽대에도 외연에만 연주문대를 첨가하고 안에는 상, 하대 문양보다는 조금 도식화되었지만 섬세한 연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연화대좌 위에 삼존상이 고부조로 새겨져 있는 모습.

특히 연곽 안에 표현된 9개씩의 연뢰는 그리 높게 돌출되지 않았지만 연잎 중앙에 소담히 피기 직전인 연봉우리를 모습을 충실히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중서란 장인이 한국 범종의 고유의 특징인 연봉우리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청녕(淸寧)4년명(1058) 종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4개의 당좌를 다시 재현하고 있음이 주목되는데, 이 당좌는 연밥이 장식된 자방을 다시 삼중원(三重圓)의 국화형 테두리로 두른 뒤 원권(圓圈) 없는 12엽의 중판 연화문으로 두른 모습이다.

이러한 당좌의 모습은 이 시기 범종에 자주 나타나는 문양인 동시에 특히 국화형 테두리 안으로 연과를 동심원으로 두른 자방의 모습은 한중서가 즐겨 사용한 당좌 문양이란 점에서 당시 지문판(地文板)과 같은 문양판이 반복 사용된 것을 말해준다.

한편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중단 면에는 흩날리는 천개(天蓋) 아래로 연화와 구름의 화려한 대좌 위에 표현된 삼존상(三尊像)이 사면에 높게 부조되었다. 이 삼존상은 결가부좌한 여래상을 중심으로 양 옆에 합장한 보살입상을 1조로 배치한 모습으로서 머리 뒤로는 유연하게 율동 치며 솟아오른 천의가 묘사되었다. 대체로 두 구씩 표현되는 합장형의 보살좌상이 삼존상으로 바뀌면서 사방에 배치하였고 당좌도 네 개로 늘어난 화려한 장식성은 이후 고려 범종의 모본이 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명문은 몸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크게 원명과 추각명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원명의 2째 줄부터 7째 줄은 청림사명(靑林寺銘)으로 시작되는 발원문으로서 임오(壬午) 6일 사주 선사담묵(禪師湛黙)이 기록하였다는 내용이다 (靑林寺銘, 扶寧邊山中有靑林 三韓前寺革古鼎今, 堂宇宏麗禪侶盍, 命白公等鑄發鯨音, 停離輪苦警悟昏沉, 几有耳者開覺本心, 壬午六月日社主禪師湛黙誌). 그리고 다음 줄 9째 줄부터 17째 줄까지는 정우 16년 6월 초 7일에 역시 사주 선사담묵(禪師湛黙)이 기록하였다는 것과 그 다음 줄에는 정우 임오 6월초 7일에 변산 청림사 금종으로 700근의 중량을 들여 주성한 것으로서 동량도인 허백, 도인 종익, 장인 한중서란 내용으로 파악된다(貞祐十年六月日社主禪師湛黙記, 貞祐壬午六, 月初七日邊山, 靑林寺金鍾, 鑄成入重七百, 斤 棟梁, 道人 虛白, 道人宗益(?), 匠 韓冲敍). 여기에 추각명으로 보이는 다음의 명문은 기유년 다음 해인 9월 7일에 지금의 내소사로 옮겨온 내용과 숭정기원후 4계축 해인 1853년에 9월27일에 김성규란 선비(隱士)가 기록한 것이란 내용이다(余己酉九月七日卜居, 靑林翌年九月七日鑿, 此金鐘移懸于來蘇寺, 銘曰性保金剛體法轉. 輪聞聲悟心花開實新, 崇禎紀元後四癸丑九月, 二十七日隱士金性圭記, 而施焉 持殿完岩正宇). 따라서 이 종은 원래 변산(邊山)의 청림사(靑林寺) 종으로 1222년에 만들어져 오랜 기간 내려오다가 조선시대 1853년에 지금의 내소사로 그 거처가 옮겨지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불교신문3373호/2018년3월7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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