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수행자 고타마로 육 년 간의 고행 끝에 서른다섯에 부다가야 보리수나무 아래서 선정삼매에 들어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큰 깨달음을 얻기 직전 악마인 ‘마라’의 유혹을 받는다. 마라는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하려고 하지만 그때마다 수포로 돌아가자 마지막 패로 자신의 딸들을 미인계로 이용한다. 마라의 딸들은 쾌락과 관능과 유희로써 갖은 유혹을 해보지만 부처님은 마침내 그들을 물리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마라’를 내면의 갈등을 일으키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큰 깨달음의 마지막 관문에서 집요한 성적인 유혹과 싸웠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욕망 중에 그게 가장 끊기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될 것 같다. 

요즘 우리 문화예술계에서 시작된 ‘미투(#Me Too)운동’이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 분야의 대가로 명성과 권위를 떨치던 이들이 자신들과 같은 분야에 속하거나 가르침을 받는 약자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던 전력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락하는 걸 지켜보면서, 부처님도 끊기 어려운 성적욕망을 ‘문화예술가입네’ 칭하는 당신네들은 여북하겠느냐, 라는 일말의 관용을 베풀고 싶다가도 그 이면에 드러나는 그들의 가증스러운 행태에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들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마라를 그들이 지닌 권력을 이용하여 추악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약자들에게 성적인 욕망을 탐했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거기에 소극적인 저항이라도 했다가는 그들의 꿈과 미래가 걸려 있는 분야에 발을 못 딛게 2차적인 폭력을 가하기 때문에 그들은 당하면서도 숨죽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런데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폭로에 함께 동참한다는 의미가 담긴, ‘나도 당했다’ 또는 ‘나도 고발한다’의 미투운동이 확산되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피해당한 당신들을 응원한다,’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라는, ‘위드유(#With You)운동’도 함께 행해지면서 그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의 용기 있는 미투에 격려와 응원을 보내며 그들과 함께할 것이다.

[불교신문3373호/2018년3월7일자] 

이선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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