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뒷모습이 항상 깨끗해야 한다”

 

만공 금봉 전강선사 회상서
수선안거…금오스님 모시고 
종단 정화불사에 적극 동참 

“참선수좌들아! 여러분은 
어디서 부처를 찾고 있는가?” 

대표적인 관광사찰 불국사에 
선원개창 수행도량모습 복원
재가자 위해 ‘부인선원’ 개원

법주사 총지선원 지도로 시작
제방선원 조실로 ‘종풍 선양’

정화불사와 종단발전을 위해 노력한 월산스님은 한 평생 수좌정신을 곧추 세웠고 청정비구의 삶을 올곧게 살다 갔다. 스님의 삶은 문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이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대들은 왜 중이 되었는가. 출세를 하기 위해서인가, 밥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예쁜 색시를 만나 살림을 차리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술이나 한 잔 걸치고 음풍농월이나 하면서 세상을 비웃기 위해서인가. 아마 백이면 백 사람을 다 잡고 물어보아도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또 묻겠다. 그대들은 여러 가지 중노릇하는 방법 중에 왜 하필이면 참선을 하려고 하는가. 포교를 하는 중도 있고 종단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중도 있고 주지를 하는 중도 있고 경(經)을 읽어 강사가 되는 중도 있고 유학을 가서 학자가 되어 오는 중도 있고 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거나 노래를 부르는 풍류중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참선(參禪)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평생 선방에서 참선을 해봐서 아는데 이 참선이란 것이 보통하기 힘든 중노릇이 아니다. 하루에 8시간, 10시간 많게는 12시간도 넘게 선방에 앉아 있으려면 그것이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차라리 속가에 나가 농사를 짓는 것이 훨씬 편하지. 그런데 그대들은 출세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중노릇 중에서도 가장 힘든 참선을 하려고 하니 모르는 사람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대들이 참선을 하려는 것은 그저 놀고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자기의 본 마음을 찾아 부처가 되기 위해서다. 그 장한 일을 하려고 그대들은 중이 되었고 중 중에서도 참선 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참선수좌들아! 지금 여러분들은 어디서 부처를 찾고 마음을 찾고 있는가? 

마음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불제조(諸佛諸祖)가 그토록 간절하게 일렀거늘 지금 왜 그대들은 남의 허벅지만 긁고 있는고! 남의 다리 긁으면 거기서 부처가 보이고 마음이 보이는가?”

성림당(聖林堂) 월산(月山) 대종사(1913~1997)는 1913년 5월 초하루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에서 부친 경주 최씨 흥규(興圭)거사와 모친 곡부 노씨(魯) 사이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종열(鍾烈)이라 했다. 신라 고운 최치원의 후예인 그는 돈독한 불교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1943년 부친이 사망한 후 안변 석왕사의 양안광스님 소개로 치악산 상원사 전금초스님을 찾아갔다. 금초스님은 망월사로 소개서찰을 써 주었다. 1944년 망월사로 가서 춘성스님의 안내로 금오(金烏)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45년 덕숭산 만공스님 회상에서 공양주 소임으로 한 철 지냈다. 그 때 만공스님으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았다. 만공 금봉 금오 전강선사 회상에서 수선 안거를 한 후 3년간 운수행각에 나섰다. 수덕사를 떠나 금오스님의 보림처였던 전남 보길도 남문사에서 비룡스님(한암스님 제자)과 함께 용맹정진 했다. 경북 청도 적천사 토굴에서의 정진은 구도자로서의 방향을 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청담, 성철, 자운, 향곡스님 등과 함께 공주청규(共住淸規)아래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잘못된 구습(舊習)을 혁파하고 올곧은 승풍을 진작시켰다. 1953년 은사인 금오스님을 모시고 종단 정화불사에 적극 동참, 비구종단의 초석을 놓는 일에 몸을 바쳤다. 1961년 팔공산 동화사 주지, 1963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를 맡았다. 속리산 법주사, 태백산 각화사,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등지에서 수행했다. 

1968년 가을 어느 날 금오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문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금오스님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문도들을 돌아보며 오른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때 월산스님이 일어나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참모습 깨닫고 보니/ 부처와 조사 어느 곳에 있는가/ 몸속에 하늘과 땅 본래 감추어 있으니/ 몸을 뒤쳐 사자후를 하노라/ 세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쉬지 않도다(忽覺本來事 佛祖在何處 裏藏乾坤 轉身獅子吼 不立 不捨 不休).” 

이에 금오스님이 대중을 돌아보며 “제반사(諸般事)를 월산에게 부촉(咐囑)하노라” 하며 인가를 했다. 금오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월산스님은 법주사 조실에 추대되어 법주사 총지선원(聰持禪院)에서 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하여 불국사 금산사 대승사 불영사 등 제방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종풍을 선양했다. 

1968년 9월7일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 해 10월8일 은사 금오스님이 법주사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1970년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유교 등 대표자들이 모여서 창립한 한국종교협의회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종교간 화해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3년 8월초 불국사 주지 직무대행, 1974년 6월 불국사 주지에 취임.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사찰에 선원, 강원을 개창하여 수행도량의 본 모습을 복원 진작했다. 또한 평소에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위하여 6000여관의 통일대종을 주조하여 토함산정에 대종각을 건립했다. 

1978년 제6대 총무원장에 취임했으며 1986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자리에서 민주적 개헌 방향을 밝혀야 소요가 진정됨을 건의했다. 

1988년 3월 재가자들의 선(禪)수행을 위해 경주시에 부인선원을 개원, 100여명의 결제대중이 항상 정진하게 했다. 월산스님은 1996년 봄부터 노환을 보였으나 항상 옛과 다름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납자들을 제접하고 제자들을 엄히 경책, 본분종장(本分宗匠)의 위의를 잃지 않았다. 1997년 9월 초 노환이 위중하여 시자들이 임종게를 간청드림에 이렇게 썼다. 

“인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땅보다 먼저이니라(回回一生 未移一步 本來其位 天地以前).” 

9월6일(음력8월5일) 오후8시30분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85세. 월산문도회는 1999년 월산스님의 2주기를 맞는 해에 ‘월산스님 법어집’을 펴냈다. 이어서 2005년 성림당 월산 대종사 부도탑·비를 불국사에 세웠다. 비문은 고은 시인이 짓고 글씨는 운포(雲浦) 정병철이 썼다. 2007년 10주기를 맞아 속리산 법주사에서도 부도탑과 비를 세웠다. 

“그대는 이 세상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무소유 삶을 산 선사 

한 평생 수좌정신을 곧추 세우고 청정비구의 삶을 올곧게 살다 간 월산스님, 당신의 삶은 문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이었다. 스님은 ‘수행자는 항상 뒷모습이 깨끗해야 한다’고 후학을 경책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대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야말로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평생 재물을 모으고 간탐한다. 마치 저승에까지 가져 갈 것처럼 욕심을 부린다. 그래서 저승 갈 때 가져 간 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이승에서 악다구니를 쓰다가 죽은 다음에 뒷모습만 추하게 남기고 있다.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고자 하는 것은 수행자는 항상 뒷모습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무상해서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른다. 

어느 날 나나 그대들이 죽고 나면 누군가가 뒤를 정리할 것이다. 그때 만약 수행자의 분수에 맞지 않은 소유물이 나오거나 뒷말이 무성하다면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앞에서만 청정한 척 가난한 척 하지 말고 남이 알아주든 말든 스스로 깨끗하고 가난해지기를 힘쓰라. 

그대들은 어떤 뒷모습을 남기는 사문이 되려 하는가. ‘가난한 도인’이라는 말을 듣도록 하라. 운수납자(雲水衲子)란 떨어진 옷 입고 바랑 하나에 지팡이 하나로 구름처럼 물처럼 도를 찾아다닌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얼마나 뒷모습이 깨끗한 이름인가. 옷이 해지면 기워 입고 또 기워 입으라. 양식이 없으면 근근이 구하여 충당하라. 환화(幻化)같은 이 몸뚱이 얼마나 살 것이라고 부질없는 일에 매달려 무명만 기를 손가.” 

■ 도움말 : 성타스님(불국사 회주), 종우스님(불국사 주지) 

■ 자    료 : 월산선사 법어집, 성림당 월산대종사 비문 

[불교신문3370호/2018년2월24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