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공(空)으로 돌아간데도 탑은 남아 스님의 법이 전해지길…

폐사지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분다. 추위에 시간마저 멈춘 듯 옛 스님의 업적이 새겨진 무거운 비신을 등에 지고 절터를 노니는 돌거북마저 얼어붙었다. 문화재청은 최근 평창동계올림픽을 맞아 ‘문화유산으로 즐기는 강원도 여행길’ 16곳을 소개했다. 이 중 여섯 번째 ‘옛 절터를 찾아서’ 코스를 지난 3일 따라갔다. 강원도 원주에는 유명한 옛 절터가 많다. 신라시대 경주에 집중되었던 불교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국토의 전 지역으로 뻗어나갈 때 원주 일대는 불교가 특히 발전한 곳 중 하나였다. 법천사지, 거돈사지 그리고 흥법사지를 찾았다. 고려초 두 분의 국사, 한 분의 왕사가 머물던 대찰에는 이제 몇몇 석물들만 남아 절터를 지키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폐사가 되고 유생들에게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강점기에 다시 유린을 당한다. 천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광, 원공국사와 진공대사의 승탑이 정원에 장식용 석물로 사용되기 위해 해체되어 자기 자리를 떠나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교종(敎宗)은 쇠잔하여 멸망에 가깝고
선종(禪宗)의 숲은 말라 공산(空山)이 되고
귀비(龜碑)도 파손되어 없어질지라도
이 승묘탑만은 영원히 남아 있어
수 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반복할지언정
스님의 높은 바람 널리 펴지소서.’

법천사지에 있는 국보 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 거대한 탑비에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해린스님(984~1070) 

법천사지(法泉寺址)는 남한강과 불과 1.7km 떨어져 있다. 바로 지척에 고려시대 12조창 중에 하나인 흥원창이 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이곳에서 세곡을 모아 강을 따라 고려 수도인 개경으로 운반했다. 법고사(法皐寺)로 불린 법천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지광국사가 머물러 사세가 커졌으나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1609년 법천사를 찾아 남긴 ‘유원주 법천사기’를 보면 난리 통에 절이 불에 탔다고 밝히고 있으니 1592년 임진왜란 때 화마를 입은 듯 짐작된다. 

거대한 사격을 말해주듯이 2001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발굴작업으로 인해 사지의 많은 곳은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국보 제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있는 구역만 개방되어 있다. 탑비에는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를 지낸 지광국사 해린(海鱗)스님의 행장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중 판독 가능한 한자가 3500자가 넘는다. 해린스님은 물이 맑게 넘치고 우물이 솟구치는 태몽을 가지고 원주에서 태어났다. 성은 원(元)씨, 어릴 때 이름은 수몽(水夢)이다. 강하(江河)와 천지(泉池)가 홀연히 범람하였고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상서로움과 비교하고 있다. 연꽃과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태어난 스님은 의지는 탐애(貪愛)를 끊는데 예리하였고 마음은 색신(色身)과 명예(名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문에 스님을 우리국사(我國師)라고 표기하는 것이 흥미롭다. 중국 성현과 비교해 어릴 적 영민함을 설명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위(魏)나라의 창서(蒼舒)가 코끼리의 무게를 작은 저울로 알아냈던 나이에 이미 불교를 전해 듣고 알았다’고 새겨져 있다. 

창서는 바로 조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조충이 배를 이용해 코끼리 무게를 잰 이야기(曹沖秤象)이고 당시 조충의 나이는 대여섯 살이라고 한다. 비문에는 해린스님이 출가해서 승가고시를 보고 국사의 자리에 오르고 어떻게 법을 펼치고 세수 87세 승랍 72세에 입적에 들 때까지의 스님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스님은 칭송하는 비문 내용 뿐 아니라 탑비는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해린스님을 기리고 있다. 4m가 넘는 거대한 탑비에 조각돼 있는 거북과 용과 같은 신물들은 마치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해린스님은 원주에서 태어나 법천사에서 출가하고 국사가 된 후 말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이곳에서 입적에 들었다. 또한 이곳에서 다비를 하고 스님의 사리는 이 곳에 세워진 승탑에 모셔졌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승탑이라고 평가받는 해린스님의 승탑(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은 비극적인 현대사로 고향을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일제강점기에 와다라는 일본인 손에 해체돼 조경용 석조물로 여기 저기 떠돌다 일본으로 반출됐다. 다행히 국내로 돌아왔지만 절로 오지 못하고 경복궁 경내에 있었다. 한국전쟁 때 크게 손상된 뒤 57년의 복원작업과 81년 전면해체보수가 이어지면서 힘들게 버텨왔다. 2016년 4월6일에는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운송돼 본격적인 보존 작업에 돌입했다. 2019년을 목표로 진행되는 보존처리 과정이 끝나면 해린스님의 승탑은 어디에 위치할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돈사지 대불좌 위에 텅빈 공간이 아쉬웠는지 관세음보살님을 모셔 놓았다.

거돈사지

원공국사 지종스님(930~1018) 

법천사지에서 산하나 너머에는 거돈사지(居頓寺址) 있다. 부론면 정산3리에는 거돈사지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불교문화의 유적지 중간말’이라는 커다란 표시석이 서 있다. 4~5m 사이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거돈사지 삼층석탑이 바로 방문객을 맞는다. 발굴 작업을 마친 거돈사지는 법천사지와는 다르게 차분한 느낌이다. 삼층석탑 뒤에는 금당터가 있고 2m가 넘는 부처님을 모시는 대불좌(大佛座)가 있다. 자연스레 그 위에 올라앉았을 불상의 웅대한 모습은 상상한다. 다가가니 비어있는 줄 알았던 불좌 위에 작은 관세음보살님이 보인다. 누군가가 품에 계신 호신불을 불좌위에 모신 걸까. 폐사지를 다니며 먹먹했던 하루에 즐거운 미소가 번진다. 사지 가장 높은 곳에 2007년도 원공국사탑이 있다. 원공국사 지종스님은 8세 때 양평 사나사에서 인도 스님인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 삭발득도 후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거돈사지에는 2007년도에 새로 세운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탑의 복제탑이 서 있다.

이후 중국으로 유학 간 스님에 대해 ‘상보(象步)로 천천히 예대(猊臺)에 올라 잠깐만이라도 불자(拂子)를 휘두르면서 설법하면 삼근(三根)에 대하여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육혜(六慧) 논(論)함에는 위력을 떨쳐 족히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둥근 담장처럼 모여 들어 우러러보며, 청중이 많아 상탑(牀榻)마저 부러졌다.’ 고 전하고 있다. 또한 귀국해서 불법을 펼친 스님에 대해 ‘구법(求法)의 길을 돌려 귀국하시니 / 영주(靈珠)가 합포(合浦)로 돌아옴과 같도다. 구마라습이 진(秦)에 옴과 같으며, / 공자(孔子)가 되돌아옴과 다름 없도다. / 불법을 온 나라에 크게 드날려 / 홀로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시어 / 그 덕화(德化) 하늘까지 가득하시고 / 어지심은 온 나라에 충만하도다.’고 칭송하고 있다.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천 년 전인 1018년 거돈사에서 “내 이제 이 법을 가져 너희들에게 부촉(付囑)하니 너희들은 잘 호지(護持)하여 혜명(慧命)으로 하여금 단절됨이 없도록 하라” 후학들에게 당부를 남기고 입적에 들었다. 스님의 업적이 새겨져 있는 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원공국사탑비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탑은 고향을 떠나 현재 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보물 제78호 원주 거돈사지원공국사탑비.

흥법사지

진공대사 충담스님(869~940) 

발굴 중인 법천사지와 발굴이 끝난 거돈사지가 있는 부론면에서 27km 떨어진 원주시 지정면에 흥법사지가 있다. 흥법사지는 아직 발굴 전이라 주변에 민가와 논밭있어 사지 같아 보이지 않는다. 보물 제463호 진공대사탑비와 보물 제464호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탑비는 현재 귀부와 이수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남아 있으나 비신은 일찍이 파괴되어 깨진 비신 4개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판독 가능한 비문에는 스님이 신라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출가하여 계율을 배우다 당나라에 가서 법을 수학하고 돌아와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사의 예우를 받고 태조의 명으로 흥법사에 주석하다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이다”며 후학들에게 일심(一心)을 근본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72세에 입적했다고 새겨 있다. 보물 제365호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또한 흥법사를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보물 제463호 진공대사탑비.

세 곳의 옛 절터 둘러보고 돌아와 천 년 전 새긴 비문 내용을 살펴보니 그 마음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 1018년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崔沖)은 왕명을 받아 원공국사 탑비 마지막에 아래와 같이 글을 쓴다. ‘교종(敎宗)은 쇠잔하여 멸망에 가깝고 / 선종(禪宗)의 숲은 말라 공산(空山)이 되고 / 귀비(龜碑)도 파손되어 없어질지라도 / 이 승묘탑만은 영원히 남아 있어 / 수 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반복할지언정 / 스님의 높은 바람 널리 펴지소서.’ 

[불교신문3369호/2018년2월14일자] 

원주=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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