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는 계절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 천천히 오는 것 같다. 여러 겹의 얼음으로 꽁꽁 싸맸던 땅을 느릿느릿 한 겹씩 풀면서 잠들었던 싹을 달래며 깨우고 있는지 모른다. 장성 백양사에는 350년이 넘는 ‘고불매(古佛梅)’라는 매화나무가 있다. 크고 노쇠한 가지에서 희고 연붉은 꽃을 피우는 그 매화를 본 후 나는 해마다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성급한 마음의 행장을 차리는 버릇이 생겼다.

이번 겨울은 참 혹독하고 매섭게 추위가 엄습하여 지나갔다. 나의 부친은 병상에 계시다 먼 길을 황망히 떠나셨고, 남기지 못했던 유언을 폭설로 뿌리셔서 세상과 나는 하얗게 덮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에 뺨을 대고는 “여보, 당신은 내게 욕 한 번도 않으셨고 단 한차례 손찌검도 안 한 사람, 너무도 착하신 당신…”이라며 가슴을 펴서 편한 맘으로 보내셨다.

고불매의 가지도 오래된 이력만큼이나 해마다 깊숙한 곳에서 부터 썩기도 하고 부러져 사라지기도하고 꺾인 채 베어지기도 한다. 그런 시련들을 겪으면서도 남은 가지들을 모아 사방으로 다리를 뻗고 팔을 흔들며 스님의 독경소리에 의지하여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짐짓,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연 또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아직 언 땅에 심신을 움츠리며 이따금 눈보라를 맞고 있는 초목들과 심지어는 한낱 미물들까지 예외가 있으랴. 겨울, 그 차갑고 긴 시간들은 떠나고 없거나 예비 된 사람들의 이별 같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라진다는 것은 다만 외부의 일 일뿐 아버지의 사랑은 영영 내 가슴 안에 깊이 새겨져 있지 않은 가! 고불매 그 고목이 내뿜은 향기와 꽃의 우아한 자태가 꽃이 진 후에라도 오랫동안 은은하게 기억되고 그립고 하는 것처럼 봄은 번뇌를 눈부시게 피어내는 재주가 있다. 눈물을 털어내고 아버지의 환한 꽃을 피우는 상상으로 벌써부터 내 몸이 붉다. 가슴 안에 있을 뿐인데 시공(時空)은 멀다.

[불교신문3369호/2018년2월14일자] 

김성신 시인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