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의 힘은 눈 밝은 선사’
어느 시대 막론 교단내·외서 
끊임없이 위협받아 왔지만
권력보다 민중과 동고동락

원융과 화쟁사상에서 보듯
다양한 교리ㆍ수행법 바탕
해탈한 선사들 배출됐기에
문화중심으로 면면히 존속

한국의 역사는 한국인만의 민속적인(무속적인) 신앙에서 불교로 변모됐고, 다시 불교에서 유교로 변천됐으며, 다시 유교에서 다종교 사회로 흘러왔다. 한국사에서 불교사 1600여 년은 문화적으로나 정신사상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축을 이룬다. 고대와 중세에 승려와 불교의 사회적인 역할은 결코 적지 않다. 한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불교’라는 코드로 찬란한 한국의 문화를 형성 발전시켰다. 

그런데 한국사에서 한국불교는 결코 찬란하지만은 않다. 처음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됐을 때는 왕권과 밀착되어 있었다. 자장율사나 의상대사처럼 승려신분에서 국가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순수한 마음도 있지만, 왕권 입장에서 지배체제 아래 승려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화엄사상을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에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러면서 신라 때는 ‘왕즉불’사상, 즉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까지 팽배했다. 이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불교사 전체를 볼 때, 불교는 왕권이나 권력 편보다는 민중들 곁에 있었다. 전쟁과 기근, 권력의 수탈로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삶의 희망을 품게 했다. 근자들어 불자뿐만 아니라 학자들까지 가세해 교계 안팎에서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런데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이래 현 즉금에 이르기까지 위기 아닌 때가 있었는가. 어느 시대고 사상적으로나 교단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그런 부조화와 불협화음에도 한국불교는 들판에 핀 야생화처럼 모진풍파를 견뎌내며 묵묵히 꽃을 피웠다. 권력이 알아주지 않아도, 권력으로부터 위협 받아도 야생화는 피고 지었다. 지금보다 조선 500년 불교는 통한(痛恨)의 흐름이었다. 승려가 천민 대접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면서까지 면면히 불심(佛心)은 흘러 민중들의 가슴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립할거라고 본다. 

늘 위기라고 하면서도 불교가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아 온 데는 선(禪) 수행을 통해 해탈한 선사들이 다양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늘 민중과 함께 해 온 것이 큰 힘이 됐다. 중국인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김교각스님이 하나의 예로 그의 육신상(사진 위)은 안휘성 구화산 육신보전에 봉안돼 있다.

불교사 측면에서 본 승려의 삶

본 원고가 인물(선사를 중심으로) 입장에서 전개되는데, 불교사적으로 역대로 우리나라 승려들의 다양한 삶과 수행의 면모를 보자. 

첫째, 한국불교의 대표 종파인 조계종과 관련해 볼 때, 선사들은 법맥에 의해 사자상승을 이루었다. 하지만 법맥과는 무관하게 한국불교 사상에 큰 업적을 남긴 승려들이 많이 있다. 고구려의 삼랑, 신라의 자장ㆍ원효ㆍ의상, 고려시대 의천 등은 한국불교 사상의 큰 축을 이룬다. 

둘째, 똑같은 출가자이지만 출가 이후 수행자의 다양한 면모이다. 교종 승려로서, 선종의 선사로서, 율사로서, 강사로서, 사경승(寫經僧)으로서, 범패 전수자로서, 다인(茶人)으로서, 포교사로서의 삶과 수행에 있어서 다양한 면이 있다. 

셋째, 우리나라가 아닌 이역만리 타국에서 수행력을 평가받은 승려들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 승려들은 타국에서 수행하고 그곳에서 열반한 경우가 많다. 중국 삼론종의 체계를 세운 승랑(5〜6세기), <왕오천축국전> 저자인 혜초, 중국인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김교각, 성덕왕의 셋째 왕자인 무상, 남종선의 상산 혜각(常山慧覺), 유식 서명파인 원측, 천태종의 제관 등이다. 

넷째, 국사와 왕사로서 왕에게 진리를 설하거나 나라에 도움 주는 경우도 있지만, 유생이나 사대부에게 반기를 들었던 승려들이 있다. 즉 국사나 왕사로서 역사에 곱게 이름을 남긴 승려도 있지만, 한국사에 요승(妖僧)이나 괴승(怪僧) 이라는 호가 따라다니는 승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승려도 한국사 측면과 불교사적 측면에서 보는 면이 다르다. 

다섯째, 귀족 출신 승려와 일반 승려의 삶의 형태가 다르다. 고려시대 천태종 승려 의선(1284˜1348)은 당시 실권자 조인규의 아들로서, 출가했지만 출가 후에도 귀족의 삶을 누렸다. 문벌귀족 출신 소현(韶顯, 1038˜1096), 문종의 4왕자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 등은 출가 후에도 힘들지 않은(?) 삶이었다. 반면 사찰에 참배 온 양반집 규수의 가마꾼 노릇을 해야 했던 승려도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 노역에 시달리다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간 승려들이 있다. 

어떤 중생이 찾아오든 그의 근기에 맞게 제도해준다는 가르침으로 상징되는 ‘조주석교’. 하북성 백림선사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한국 선사상과 조계종 특징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국가이지만 근자에 위빠사나 수행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초기불교 관련 논문과 수행법이 보편화됐다. 그러니 대승이든 상좌부 불교이든 어느 하나가 정법이라고 우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어느 하나라도 배제할 수 없는 한국불교의 현황이다. 한편 어떤 수행법이나 불교학이든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선(禪)을 표방하지만 화엄사상, 법화사상, 정토신앙 등 다양하다. 법당의 내부 구조와 의식 속에도 드러나 있다. 또한 행법으로 참선, 간경, 염불, 주력 등 다양한 수행법이 있으며, 불교의례도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다. 이런 통합적인 조계종의 면모를 비유로 들면, 잡화포와 조주석교에 비견된다. 

무자(無字) 화두로 유명한 조주 종심(趙州 從心, 778˜897)과 관련된 기연 가운데 ‘조주석교’가 있다. 곧 조주를 찾아오는 길에 석교(石橋)가 있다. 한 학인이 조주에게 와서 “조주의 돌다리 소문을 들었는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뿐이다”라고 핀잔한다. 조주는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는 보질 못했군”이라고 한다. 학인이 “돌다리가 어떤 것이냐?”고 하자, 조주는 이렇게 말했다. “나귀도 타고 말도 건너지.” 

곧 조주석교란 어떤 중생이 찾아오든 그 중생의 근기에 맞게 제도해준다는 뜻이다. 또 위앙종의 앙산 혜적(仰山 慧寂, 807˜883)은 자신이 속한 파(남종의 마조계)를 잡화포에 비유했다. 다양한 물건을 다 파는 가게를 의미하는데, 곧 다양한 사람들의 각 근기에 맞춰 제도해준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조주석교나 잡화포처럼 조계종은 선을 표방하지만, 다양한 교리와 수행법이 존속되어 왔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조계종의 특징을 원융과 화쟁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이 경우에 통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어찌되었든 조계종의 근간은 선(禪)이고, 수행을 통해 해탈한 선사들이 배출되었기에 조계종은 면면히 존속될 수 있었다. 바로 눈 밝은 선사들이 배출되었다는 점, 이것이 조계종의 힘이다. 

[불교신문3368호/2018년2월10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