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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 (2018).2.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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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화사 지방학림 3.30만세운동“우리도 조선 민족인데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인 스님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결의한 심검당. 대웅전을 바로보며 왼쪽에 있는 건물로 지금은 법화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심검당 편액은 대웅전 옆에 있는 건물로 옮겨 달았다.

동화사 지방학림 스님들 주도 
덕산정시장 장날에 맞춰 거사
‘대형 태극기’ 매단 깃대 세워
10명 체포 징역형 옥고 치뤄

1919년 3월 28일. 팔공산 동화사 심검당(尋劍堂)에 젊은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동화사 지방학림에 재학하고 있는 9명의 스님이었다. 청년승려 김문옥(金文玉)과 권청학(權淸學)이 조심스럽게 소집한 자리였다. 김문옥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신문에 난 기사를 봐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조선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조선 민족의 한 사람인데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검당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누구도 김문옥의 뜻에 반대하지 않았다. 앞다투어 찬성을 하고 거사일을 정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의했다. 논의를 거쳐 3월30일 대구 덕산정시장(지금의 염매시장) 장날에 봉기하기로 하고 그날까지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이 무렵 동화사 주지는 1917년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 조선총독부에 청원한 친일승려 김남파(金南坡)였다.

김문옥과 권청학 등은 이보다 앞선 3월23일 서울에서 내려온 윤학조(尹學祚)를 만나 서울과 각 지역의 만세운동에 대해 상세하게 들었다.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학생으로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에 동참한 윤학조는 달성군 공산면이 고향이었다. 그는 동화사 학림에 다니고 있는 김문옥과 권청학 등을 만나 독립을 위한 궐기에 동참할 것으로 요청했다.

김목옥과 권창학은 윤학조의 후배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이 비밀리에 회동한 것은 동화사 아미산 포교당이었다. 이 자리에서 윤학조는 용성, 만해 스님이 민족대표로 참여하고 불교중앙학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만세운동에 대해 전했다.

독립을 위해 거국적 운동의 필요성에 의기투합한 청년승려들은 처음에는 공산면 백안시장(百安市場)에서 시위를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는 대구 덕산정시장 결행하자”는 윤학조의 뜻을 따라 장소를 바꾸었다. 이러한 결의를 며칠뒤인 3월28일 동화사 심검당에서 다시 확인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김대용(金大鎔)도 윤학조와 함께 대구를 찾아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동화사 재적승인 권청학은 해인사 지방학림에 재학하다 대구, 달성, 영천에서 독립운동을 맡기로 해서 동화사에 와 있었던 상태이다.

덕산정시장 만세운동을 결의한 김문옥 등 동화사 지방학림의 9명은 거사 하루전인 3월29일 동화사를 나섰다. 그날 저녁은 동화사 출장소에서 묵었다. 인근의 김상의(金尙義) 집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동화사 출장소는 1910년 3월 동화사가 개원한 아미산 포교당으로 지금의 보현사이다. 학인들은 포교당에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다음날 만세운동을 차질없도록 준비에 몰두했다. 당시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19년 3월30일 장날을 맞아 동화사 스님들이 주도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덕산정 시장. 지금의 염매시장으로 대구 반월당역과 중앙로역 사이에 있다.

다만 1914년 2월 발행된 <해동불교(海東佛敎)> 제4호에 실린 ‘본산 본말사별 학생수 일람’과 1918년 1월에 나온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의 ‘삼십본산부(三十本山付) 말사승니급(末寺僧尼及) 학생(學生), 신도수조(信徒數調)’를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조선불교총보> 자료는 1917년 현황을 담고 있다. 이 에 따르면 1914년과 1917년에 동화본말사 지방학림에는 각각 38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9년 무렵에도 40명 가까운 학생들이 지방학림에서 수행과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보인다.

당시 대구는 3.1운동후 만세운동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일경(日警)의 감시가 삼엄했음은 물론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날은 비상경계령이 발동됐다.

3월 30일 김문옥은 미리 하얀 천에 그린 커다란 태극기를 숨겨 덕산정시장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점점 불어났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후 2시가 되었다. 어느새 3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김문옥을 비롯한 동화사 지방학림 학인들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높이 매단 장대를 시장 복판에 세웠다. 그리고 소리쳤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 ” 우렁찬 만세 소리에 군중도 두팔을 하늘 높이 올리며 함께 외쳤다. 덕산정시장에는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조선인들의 함성으로 덮였다. 동화사 학생들은 장대에 매단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행진했다. 그 뒤를 군중이 따랐다.

일제는 가만 있지 않았다. 커다란 태극기를 단 장대가 시장 복판에 세워지고, 학생과 군중의 조선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자 곧바로 진압에 나섰다. 총검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일경은 주동자인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체포되었다. 다음과 같다. 윤학조(25세, 불교중앙학림), 김문옥(20세), 권청학(21세), 이성근(李成根, 19세), 김종만(金鍾萬, 21세), 김윤섭(金潤燮, 20세), 이기윤(李起胤, 21세), 박창호(朴昌鎬, 19세), 허선일(許善一, 23세), 이보식(李普湜, 20세, 이상 동화사지방학림). 10명의 학인 스님들은 대부분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윤학조는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하였고 동화사 부속 지방학림생도들에게 독립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고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실형을 받았다. 옥고를 치룬 이 가운데 김문옥은 1990년, 이기윤은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갂각 추서 받았다. 동화사 지방학림은 1개월간 강제 휴교 조치를 당했다. 이날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사건은 ‘3.30 대구만세운동’이라 불리고 있다.

1910년 3월3일 동화사가 개원한 ‘아미산 포교당(보현사)’으로 향하는 골목길.

덕산정시장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독립기념관은 ‘대구 중구 계산동 2가 250’로 추정하고 있다. 그 까닭에 대해선 “<이만집 등 판결문> <이영호 판결문> <고등경찰요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면서 “향토역사관 이호 학예사의 증언과 1927년 <대구지적도>를 통해 남문외 시장(현 염매시장)의 위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날 만세운동은 지역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에도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반향이 컸다. 다음은 1919년 4월3일자 <매일신보> 기사이다. “항자 소요 이래로 헌병 분대 및 경찰서에서난 엄중이 경계중이던 바 삼십일 덕산정시장에서 달성군 후산면 동화사의 출장소되난 대구 덕산정포교소의 승려 열명은 오후 한 시경에 작은 구한국 국기를 들으며 만세를 불렀음으로 검속하얏다더라.”

소요는 1919년 3.1운동을 지칭하는 것이며, 삼십일은 3월30일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헌병과 경찰이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경비망을 뚫고 스님들이 덕산정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대형 태극기를 깃대에 달았다’는 사실과 달리 <매일신보>는 ‘작은 구한국 국기를 들으며’로 축소했다. 또한 군중 수천명의 동참은 거론하지 않고 승려 열명이 참여한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대구는 1919년 3월4일 즈음에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도착했으며, 학생과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3월8일과 10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대구시 전역을 휩쓸었다. 대구지역 3·1운동은 크게 3차례 일어났다. 제1차는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제2차는 3월 10일 덕산정 시장, 그리고 제3차 운동이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승들이 덕산정 시장에서 일으켰다. 일제의 탄압에 잠시 주춤한 듯 보였지만 항쟁은 이어졌던 것이다. 

참고자료 및 도움말

국가기록원, <일제하 불교계계의 항일운동>(임혜봉, 민족사), <매일신보>,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국내독립운동 국가수호 사적지’

 

대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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