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불교그림에 부처님이 없는 까닭은?

기원정사 벽화 최초 불교그림 
무불상시대 부처님 존상 대신
보리수 법륜 불탑 불족적 표현

불멸 500년 이후 불상 조성해
인도 간다라, 마투라 불상 시초
불교 전래되며 불교벽화 조성
지역 시대 따라 특색있게 발전

인도 마하라슈트라주 오랑가바드현 아잔타석굴 9굴 내부

사찰에 가면 전각 내, 외벽의 단청에서부터 전각 내부의 갖가지 불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화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 불화는 언제부터, 어떻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빠르게는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늦어도 기원전 2~3세기경부터는 그려졌다고 한다. 올해가 불기 2562년이니까 적어도 2700여년 전부터는 불화가 그려졌다는 얘기다. 

경전에 의하면 불화가 최초로 그려진 곳은 사위성(舍圍城, rvast)의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라고 한다. 사위성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부처님이 24년이나 머무신 곳으로 <금강경(金剛經)>의 무대가 된 곳이자 왕사성(王舍城)의 죽림정사(竹林精舍, Velavana)와 함께 최초의 불교사원 중의 하나인 기원정사가 있던 곳이다. 

부처님이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사위성에서 설법을 하실 때 돈많은 장자인 수닷다(Sudatta)가 제타(Jeta)태자의 동산을 보시 받아 기원정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현재 그곳에는 여러 곳의 승원(僧院) 터와 스투파(stupa, 塔)의 기단부가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바로 이 기원정사에 불교최초의 불화가 그려졌다. 이에 관해서는 설일체유부파(說一切有部派, 카시미르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던 부파불교시대의 한 부파)의 경전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에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수닷다장자가 제타태자에게서 동산을 보시 받아 기원정사를 지은 후 여기에 무엇인가를 장식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부처님께 무엇을 그릴까를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뜻대로 하라고 하셔서 화공(畵工)을 부르고, 다시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부처님께 여쭈니 다음과 같이하라고 하셨다. 

즉 사원의 문 양쪽에는 몽둥이를 들고 문을 지키는 야차(執杖藥叉)를 그리고, 그 옆에는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행하신 그림(大神通變)과 인간이 오취(五趣, 天·人·畜生·餓鬼·地獄의 五道)에 윤회하는 모습을 그린 오취생사륜도(五趣生死輪圖)를 그리고, 처마에는 본생도(本生圖), 불전의 문 옆에는 지만야차(持夜叉), 강당에는 스님이 설법하는 그림, 식당에는 음식을 들고있는 야차(持餠藥叉), 창고의 문에는 보배를 지키는 야차(持寶藥叉), 안수당(安水堂)에는 물병을 가진 용이 묘한 영락(瓔珞)을 붙인 그림을 그리고, 욕실과 화실에는 천사경(天使經)의 법식에 의한 그림과 약간의 지옥변상(地獄變相), 첨병당(瞻病堂)에는 여래가 몸소 병을 간호하는 상, 대소행처(大小行處)에는 시체의 모습, 방 안에는 마땅히 흰 뼈와 해골을 그리라고 대답하셨다. 

인도 우타 프라데시주 스라바스티(사위성) 기원정사.

경전에 기록된 최초의 불교그림이자 불교벽화인 기원정사의 벽화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기록 자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초기 불교사찰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불화가 그려졌다.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림들은 대부분 건물의 용도와 기능에 맞는 그림이었던 듯하다. 예를 들어 문 양쪽에는 몽둥이를 들고 있는 야차를 그렸는데, 현재 사찰 입구에 인왕상 같은 수문신(守門神)을 봉안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찰로 들어가는 문 옆에는 부처님의 신통력을 보여주는 대신통변과 인간이 육도에 윤회하는 모습을 그린 오취생사륜도를 그렸다고 한다. 대신통변, 오취생사륜도 같은 불화들은 신도들에게 종교적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신도들을 교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 처마에 그려진 본생도(本生圖)는 석가모니의 전생을 그림으로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희생정신과 보시(布施)의 마음을 갖게 했으며, 지옥변상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림으로써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경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인도의 초기 사원에서는 각각의 건물의 용도에 맞는 그림을 그려 장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기원정사의 어디에도 부처님의 모습, 즉 존상(尊像)을 그렸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원정사처럼 중요한 사원이라면, 오늘날 대웅전에서처럼 의례히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 불화(존상화)나 불상을 모셔놓고 예불을 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런 내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위의 내용이 적혀있는 경전의 편찬시기가, 부처님을 인간의 모습처럼 그린다는 관념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대, 즉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에 속했기 때문이다. 기원후 1세기 후반경 불상이 조성되기 이전까지 무불상시대에는, 이미 열반에 든 부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따라서 이때는 예배대상으로서의 부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조성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도 않았다. 

본생도와 불전도처럼 부처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나 조각에서조차도 부처님을 직접 그리거나 조각하지 않았다. 보리수(菩提樹, 부처님의 성도), 법륜(法輪, 부처님의 가르침), 불족적(佛足跡, 부처님의 발자취), 탑(塔, 부처님의 열반) 등으로 상징의 대신했다. 다시 말하면 요즈음처럼 전각 중앙에 모셔놓고 예배하는 존상화는 없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원전 2~3세기경에 개착되기 시작한 아잔타(Ajanta)석굴 벽화이다. 

아잔타석굴은 인도의 봄베이근처 오랑가바드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도 최고의 석굴사원이다. 이곳에는 기원전 2~3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경에 조성된 29개의 석굴사원이 남아있다. 이 석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인 기원전 2~3세기경의 9굴, 10굴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벽화가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그림은 벽 위쪽에 그려져 있는데, 워낙 오래전 그림이다 보니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일부만 남아있다. 

지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행렬도와 본생도 및 장식적인 그림 일부뿐이다. 물론 처음 이 석굴을 개착했을 당시에는 부처님의 본생도(本生圖)와 불전도(佛傳圖)를 비롯한 다양한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곳에도 역시 부처님의 모습을 그려놓고 예배하는 전통은 없었었다. 왜냐하면 아잔타석굴의 9굴과 10굴이 조성되었던 기원전 2~3세기경 역시 무불상시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도의 초기 사원에서는 기원정사와 아잔타 석굴처럼 부처님의 전생담과 불전, 건물 용도에 맞는 그림, 불교 교리를 나타내는 불화를 그려 장식하였지만, 정작 부처의 모습을 그린 존상화는 없었고, 상징을 통해 부처님을 표현하였다. 석가모니 입멸 후 약 500여 년 뒤인 1세기 후반경, 인도 북부 간다라(Gandhara) 지방과 중부 마투라(Mathura) 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하였다. 부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전통을 깨고 드디어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불화에서도 부처님을 보리수나 탑, 불족적 등 상징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인도에서 기원한 불화는 점차 불교가 전파되면서 북쪽으로는 서역, 중국을 거쳐 한국·일본으로, 남쪽으로는 실론을 거쳐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래되면서 지역·시대에 따라 특색 있는 불화로 발전했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북로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에서는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찬란한 불교벽화가 꽃을 피웠다. 타림분지 동쪽 끝에 위치한 돈황(敦煌)에도 일찍이 석굴사원이 개착되었다. 중국 본토에서는 당대 이후 일반사원에서도 벽화와 불화가 조성되었으며, 원대 이후에는 라마교에 근거한 티베트불화 양식이 널리 유행하였다. 

아잔타석굴 17굴 입구에 그려진 오취생사륜도.

우리나라에는 372년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되어 375년 사찰이 세워짐에 따라 그때부터 불화가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 삼국시대의 불화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사실주의양식의 불교회화가 활발히 제작됐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시대에는 왕실을 비롯한 귀족, 승려 등의 시주 발원에 의해 호화로우면서도 정교한 필치의 불화가 다수 조성되었다. 개국 초부터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화는 크게 위축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사찰의 중건, 중창과 함께 불화가 활발하게 조성되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불화가 전해져온다.

[불교신문3363호/2018년1월24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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