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교청년이 앞장서 독립운동 전개하자"

하루 전 '유심사'서 만해 스님 
중앙학림 학생들과 비밀 회동
선언서 밤새 배포, 시위 주도
당일 종로에서 정동까지 만세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탑골공원 팔각정. 이날 중앙학림 학생들은 시위 대열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2월 28일, 음력 1월 28일 밤 10시. 어둠이 짙게 내려 앉았다. 젊은 학생들이 주위를 몇 번이나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들은 하나 둘 서울 계동의 한 골목 안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불교잡지 <유심(唯心)>을 만드는 유심사(唯心社) 건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자택이었다. 3.1만세운동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만해스님과 학생들의 회동은 심상치 않았다.

신상완(申尙玩), 백성욱(白性郁), 김상헌(金祥憲), 정병헌(鄭秉憲), 김대용(金大鎔), 오택언(吳澤彦), 김봉신(金奉信), 김법린(金法麟), 박민오(朴玟悟). 이날 저녁 만해 자택에 모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만해스님의 영향을 받아 유심회(唯心會)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다. 

중앙학림은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서울 명륜동에 있던 고등교육기관으로 동국대의 전신이다. 마흔 살의 만해스님은 스무살 전후의 청년들에게 “내일 탑골공원에서 조선독립을 외치는 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면서 “밤새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하라”고 당부했다. 또한 “서울 시위 후에는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확산시키라”고 강조했다.

이날 만해스님은 “여러 날을 궁금해 하는 제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겠다”면서 “혹시 비밀이 누설될지 몰라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면서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어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두려울 것도 걸림도 없다”면서 “오로지 부처님의 혜명(彗命)은 받들어 대한 독립을 달성하는데 정진하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낮은 목소리지만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만해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제군들은 서산(西山)과 사명(四溟) 양 대사의 법손(法孫)임을 굳게 명심해 불교 청년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우리 불도(佛徒)가 다른 교도들의 앞장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

만해스님의 말을 들은 청년학생들도 표정에 결연함이 묻어났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역사적 대업에 동참하는 사명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탑골공원을 나온 중앙학림 학생 등 시위대는 종로경찰서를 지나 가두 행진에 들어갔다. 종로타워(왼쪽)와 YMCA(오른쪽) 사이에 있는 건물이 일제강점기 종로경찰서이다.

구한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침탈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에 이어 고종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 민심이 가마솥처럼 들끓었다. 국조오례의에 근거해 다섯 달 간 국장(國葬)을 엄수해야 함에도 일제의 강요로 불과 한달반만에 서둘러 장례를 치러야 했다. 3월3일 거행되는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인파가 상경한 상황에 맞춰 3월1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이날 밤 중앙학림 학생들은 만해스님이 이종일 보성사(普成社) 사장에게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 1만매를 나누어 들고 유심사를 나섰다. 혹시 일본 순사(巡査)가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비밀이 잘 유지되었기에 무사하게 계동을 벗어났다. 보성사는 현재 서울 조계사 옆 수송공원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공원에는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의 동상이 서 있다.

이날 유심사를 나선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전한다. <동국대 백년사>에 따르면 “중앙학림 청년 학생들은 두 방향으로 나눠 절반은 서울 동북부 일대에, 나머지는 전국의 지방 각 사찰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로 했다”면서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각각 해산하여 서울 시내 포교당과 시외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사찰과 인근 주민들에게 3.1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장하였다.” 중앙학림 기숙사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분배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데 대각사상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대각사상>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만해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동국대 학생들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여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협의하였다. 학생들은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격으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격으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를 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학생들이 ‘전국불교도독립운동총참모본부’를 결성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범어사 포교당의 주소는 ‘경성 사동(寺洞) 28통 6호’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안국동에서 북촌으로 올라가는 감고당 길의 오른쪽, 즉 (지금은 강남으로 이전한) 풍문여고 근처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만해스님과 학생들이 3.1만세운동 전날 밤 거사를 도모한 유심사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92-3에 자리한 유심사는 현재는 유심당(唯心堂)이란 이름의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다. 벽에 붙어있는 ‘3.1운동 유적지 : 유심사 터’ 안내판의 내용은 이렇다.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가 있던 곳.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

유심사는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제3호까지 발행한 장소이며 만해 스님의 거처로 사용됐다. 3.1만세운동의 성공을 위해 천도교와 기독교에 대한 교섭을 마무리한 최린이 만해스님을 만나 불교계 동참을 확약 받은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이다.

3.1운동 당시 선언서를 배포하고 거리 시위를 주도한 신상완(1891. 5. 6 ~ 1951. 1.28)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임정 특파원과 선전대원으로 활동하며 1919년 7월, 1920년 2월 국내에 파견돼 활약했다. 그는 1920년 4월 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1923년 5월 풀려났다. 1951년 세상을 떠났으며, 1995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그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다루겠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 만해 한용운 스님이 중앙학림 학생들과 거사를 논의했던 유심당 건물.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다.

1919년 3월1일 정오 탑골공원에 운집한 수천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신상완도 중앙학림 학생들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짖었다. 선언서 낭독이 끝난 후 독립의 당위성과 결연한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남문을 통해 공원을 나섰다. 

신상완을 비롯한 중앙학림 학생들도 거센 파도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탑골공원을 나와 오른쪽 대로를 따라 걸으며 만세를 외쳤다. 지금의 YMCA 옆에 있었던 종로경찰서와 종각에서 좌회전을 하여 숭례문으로 향했다. 연도에 선 군중들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지금의 한국은행까지 걸어와 오른쪽 길을 따라 대한문(大漢門)으로 향했다. 이어 대한문 옆 덕수궁 길을 따라 서대문 방향으로 행진을 이어갔다. 미국영사관과 프랑스영사관이 있는 정동(貞洞)에서 자주독립을 목청껏 외쳤다. 

1919년 3.1운동의 핵심에 불교가 있었고, 그 선두에는 중앙학림의 청년학생과 스님들이 있었다. 민족의 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언한 3.1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불교계의 항일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참고자료 및 도움말
<동국대학교 백년사>(동국대)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민족사> <3.1운동과 불교계>(안계현 논문) <불교계 3.1운동의 회고와 전망>(김순석)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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