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승가대학 학장 일진스님

스님의 책상

서너평 남짓한 학장 스님의 작은 방 구석자리에 ‘앉은뱅이 책상’이 있다. 녹색 책상보가 옛스럽다. 스님은 이 소박한 책상에서 강원 수업을 준비하고 학인들이 낸 과제물을 점검한다. 이따금씩 붓글씨를 쓰기도 한다. 책상에는 얼마 전 졸업시험을 치른 대교과 학인들이 제출한 시험지도 있다. 졸업 앞두고 학장 스님에게 선물한 ‘롤링 페이퍼’에는 수다스런 여고생 같은 필체가 가득하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운문사승가대학 학장실은 예상과 달랐다. 큰 방에 고급 명패를 세운 덩치 큰 책상이 있을 줄 알았다. “실망하셨어요? 젊었을 적엔 책상도 엄청 크고 책도 이만큼씩 쌓아두고 살았는데, 이젠 이렇게 산답니다. 호호호.” 운문사승가대학 학장 일진스님은 이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교무도 보고 차 마시며 학인들과 상담도 한다고 했다. 잠을 자는 방도 여기다. “낮에는 도서관도 되고 상담실도 되고, 다포를 펴면 다실이, 이불 펴면 침실이 된답니다. 학장실은 누구에게나 개방합니다. 학인들이 책을 빌려가기도 하고, 좋은 책은 가져다 주기도 하죠. 정말로 책이 차고 넘쳤는데 요즘엔 후배 신도님이 차린 도서관에 기증해서 책이 몇권 없어요.”

소박하고 조금 촌스러운 일진스님의 책상에는 경전은 물론 다양한 장르의 책이 놓여 있다. 시집이나 수필집을 여가시간에 자주 보고, 간혹 수업 때 소개한다.

일진스님이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수필가 구활씨가 쓴 <문득 그대>다. 작가와의 오랜 인연 덕분에 며칠 전 택배로 선물받은 에세이집이다. “수종사의 풍경소리, 섬마을 스님들의 사랑이야기, 멋쟁이 사찰 내소사, 상원사 계곡의 문수보살…. 어쩌면 이 분은 스님들보다 불교를 더 멋지게 이야기 하는지. 정말 대단한 거사님이셔.” 올해로 15년째 승가대학에서 <화엄경>을 논강하는 일진스님이지만, 틈틈이 읽는 책은 이같은 에세이집이 많다. <문득 그대>에 수록된 또 다른 에세이 한 대목을 소리내 읽어주는 스님. “저승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띠리르릉 띠리르릉…’ 두 번쯤 신호가 가더니 ‘이 전화는 없는 번호이니 헛짓 그만하고 끊어주세요’라는 녹음된 음성이 영어로 들려왔다. 그럴 줄 알았다. 내 전화기에 친구의 번호는 멀쩡하게 살아있었지만 친구는 가고 없다….” 책을 읽는 스님의 낭랑한 음성이 생기발랄하다.

스님과 절친한 작가 박원자씨가 초발심을 주제로 저술한 <스님의 첫마음>도 스님이 곁에 가까이 두는 책이다. “스승의 엄정한 가르침과 자애,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구도과정에서 겪은 좌절과 한탄, 출가수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환희와 행복 등등 50여분 스님들 이야기가 전하는 한 편 한 편의 울림이 큽니다. 저도 스님이지만 스님들의 초발심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마음이 훈훈해지죠.” 스님이 쓴 책은 스님이 읽는 마음은 어떨까. 묻자마자 “너무 좋죠”라는 즉답이 돌아왔다. 월호스님의 <아무도 너를 묶지 않았다>, 법정스님의 <날마다 새롭게>, <일기일회>, 자현스님의 <작정하고 재미있게 쓴 에피소드 인도> 등도 일진스님 책상을 지키고 있다.

일진스님의 책상.
스님은 책을 보면 만행을 떠나는 듯 행복하다고 했다.

학인들과 마주앉아 논강할 때 제일 신나고 행복하다는 일진스님은 강사답게 언어와 사색, 강의에 관한 책도 즐겨 읽는다. 신영복의 <담론>도 그 중 하나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마음’을 다스리고 <강의>에서 동양고전을 이야기했는데, <담론>은 두 책을 합쳐놓은 듯해요. 동양고전의 사유로 세계를 인식하고 고전을 현재의 맥락에서 연결하는 관점이 마음에 듭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에요. 볼 때마다 다른 시선을 갖고 강의 할 때마다 지금 현재의 삶과 맞물려서 이야기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어령씨가 쓴 시해설집 <언어로 세운 집>도 스님의 여가를 채워주는 귀한 책이다. “1996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다시 읽는 한국시’가 20여년만에 책으로 출간된 거에요. 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전기적 배경, 뭐 이런거에 치우쳐서 본연의 시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는데 이 책은 시어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를 일깨워주고 일상의 평범한 언어에 감추어진 시의 아름다운 비밀을 들춰볼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유발 하라리의 명작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도 스님이 최근에 본 잊지 못할 책이다. 사전처럼 두껍지만 단숨에 읽었다. “호모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란 뜻인데 여기서 신은 기독교의 유일신 같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에요. 기술을 통해 초능력과 같은 막강한 힘을 얻게 된 인간을 가리킵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창조하는 호모데우스의 시대에 호모 사피엔스가 의존하고 있는 인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화두를 던져줍니다. 유발 하라리는 앞으로 몇십년 지나지 않아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기술 덕분에 인간의 생리기능 면역계 수명 뿐 아니라 지적 정서적 능력까지 크게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측하더군요. 부자들은 영원히 살고 가난한 사람들만 죽어야 하는 세상?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일진스님은 뇌과학에도 관심이 있다.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이라는 탐구자들이 쓴 책 <유니버설 랭귀지>와 홍삼의 작가의 저서 <뇌과학과 한의학의 만남>도 스님의 책상 한 켠을 자리잡고 있다. “생명의 에너지, 언어와 의식, 자연과학으로 본 인문학 등과 함께 뇌과학에 기반한 훈련으로 단련되는 과정도 흥미진진합니다. ‘두뇌의 건강’이라는 영역도 호기심이 가고….”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스님들은 유독 여행에 관심이 많다. 스님들에게 여행은 수행과 다름없는 만행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여행전문가 팸 그라우트가 쓴 <당신의 인생을 바꾸는 100대 여행지>는 일진스님이 좋아하는 책이다. “생각보다 많은 나라를 다녀보지는 않았어요. 여행서적은 보는 것만으로 좋아요.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잖아요. 팸 그라우트 라는 사람이 여행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나눔을 실천하면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스님의 작은 책상에, 그리고 소박한 책꽂이에 유독 같은 책이 여러 권 눈에 띈다. 이상복 대구대 교수의 <청춘의 위로와 긍정>이란 책이다. 스님보다 나이는 많지만, 스님을 엄마로 불렀던 딸같은 이 교수가 이번 세상에 두고 간 유작이다. 아주 어려서 엄마를 잃은 이 교수는 이 책에 일진스님이 자신에게 어떤 ‘엄마’였는지 처음으로 세상에 자랑했다. 2011년 대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출간기념회에서 그 많은 하객들을 앞에 두고 우리 엄마라고 스님을 소개했던 이 교수는 다시 재발한 암덩어리를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스님곁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 교수님 떠나고 3년간 생일제사까지 정성껏 지내드렸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 나 죽지 않았으면 좋겠지?’라는 농담을 하고는 편안하게 떠났어요. 아마도 내 덕분에 극락에서 아주 잘 살고 있을 겁니다. 하하.”

일진스님이 책을 보는 시간은 주로 저녁시간대다. 운력 많기로 유명한 운문사인 만큼, 아침이나 낮에는 대중 스님들과 청소하고 마당 쓸고 풀뽑는다. 학장 스님이라고 열외가 아니다. “제가 얼마나 풀을 잘 뽑게요? 마당쓸기도 전문가 수준급이랄까? 주로 저녁공양에 예불 마치고 오후 6시부터 학인들 독경할 때 입선을 하거나 책을 봐요. 책 속에는 강의할 때 써먹을만한 좋은 재료들이 엄청 많아요. 어느때는 학인들이 자기들보다 제가 더 젊은피라고 치켜세워준다니까요.”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그냥 웃어요’라는 말을 버릇처럼 자주 하는 일진스님은 “이제 곧 졸업식인데 우리 학인들에게 어떤 ‘전도선언’을 해서 떠나 보낼까 궁리 중”이라고 했다. ‘큰 나무’, ‘롤모델’, ‘우상’, ‘목련꽃 웃음’, ‘한국불교계 국보’, ‘비구니계 보물’…. 학인 스님들이 롤링 페이퍼에 써넣은 글에서 일진스님의 면모가 묻어난다.

 

일진스님의 강의법

운문사승가대학에서 15년째 화엄경을 강의하지만 스님에겐 이렇다할 강의자료가 없다. 경전에 담긴 뜻을 오늘의 안목과 시선으로 이야기하듯이 강의한다. 물론 학인으로서 꼭 필요한 경전과 외워야 할 게송은 있다. 외우고 쓰는데 지나치게 시간을 많이 할애할 필요는 없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같은 경전이라도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어요. 바로 그러한 안목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죠.”

스님은 승가대학 졸업반 학인들에게 시험을 대신해 4년의 삶과 소감을 글로 받는다. 올해도 그 시험을 치렀다. “한 학인이 4년간 운문사에 살면서 행한 운력과 소임, 의식이 삶의 힘이 됐다고 하더군요. 그 힘으로 세상에 나가 요소요소 잘 꺼내 쓰겠다고. 공부는 빌리거나 얻고 받는 것이 아니라 지니는 겁니다. 자기 것이 되어야 하는거죠.”

일진스님은 또 학인들이 졸업 전 회주 명성스님과 면담하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한다. 공부점검도 받고 원력도 다지는 소중한 자리다. “큰스님께서 이 시간을 좋아하셔요. 학인들 은제 오나 하시면서 은근히 기다리시는 것 같아요. 운문강원에서 4년을 살았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회주 스님과 이런 자리를 만들겠어요?” 큰스님을 모시는 제자이자, 제자를 기르는 스승인 일진스님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한다. “제가 잘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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