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최대 석불입상

보물 218호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보물 218호 논산 관촉사 석보조살입상은 고려 광종 때 조성됐다. 높이가 18.12m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 앞에 서면 먼저 느껴지는 게 압도적인 크기다. 이층 기단을 밟고 선 불상 옆에 사람이 서면 겨우 발목에 미칠 정도니, 불상을 친견하려면 한 없이 뒤로 물러서야 한다.

독특한 생김도 인상적이다. 두꺼운 턱선에 비해 좁은 이마로 인해 얼굴은 사다리꼴에 가깝고 두툼한 코와 입술, 가로로 시원하게 트였는데 눈 위에는 백호가 선명하다. 머리에는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관 위에는 면류관 형태의 사각형 보개(寶蓋)가 이중으로 얹혀 있다. 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해 전체적으로 4등신 정도의 비율을 갖고 있다. 손도 비교적 크게 새겨졌는데 왼손은 배 위로 올리고 손목만 아래로 향하게 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철로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하반신의 조각은 섬세하지 않은데, 천의자락 끝에 기단을 밟고선 발가락이 묘사돼 있는데 전체적으로 투박하다. 부여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이 관촉사 불상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지역에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투박하면서도 독특한 외형의 불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역사가들은 고려 광종이 관촉사를 창건한 배경에 대해서는 왕권을 강화한 방편으로 보기도 한다. 후백제 지역으로 태조가 마지막까지 전쟁을 벌였던 충남 일대에 사찰을 창건하고 거대한 불상을 세워 귀속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관촉사 창건과 불상에 대한 얘기는 조선시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 오른 것을 혜명스님이 쪼아 불상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조선 영조 때 1743년 세워진 관촉사사적비에는 보다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고려 광종 19년(968) 한 여인이 반약산에서 고사리를 캐다가 땅속에서 커다란 바위가 솟아나는 걸 목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혜명스님을 천거해 그곳에 사찰을 짓도록 하고 장인 100명을 보냈다. 970년 착공해 36년만인 1006년에 불사를 회향했다.

기중기도 없던 시절 고려인들은 18m에 달하는 거대한 보살상을 어떻게 산 중턱에 봉안했을까. 사적비에는 그 과정도 남아 있다. 완공된 불상을 산 중턱으로 옮기는 데 동원된 인원은 자그마치 1000여 명에 달했다. 불상을 도량으로 이운했으나 세울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혜명스님은 아이들이 흙장난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평지에 우선 몸체를 세우고 그 옆에 같은 높이로 흙길을 쌓아 부재를 올리는 방법으로 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불상이 다 세워지자 열흘간 비가 내려 흙을 씻어주고, 사방에 소문이 퍼져 불상을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관촉사 앞은 시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은진미륵’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관촉사 석조보살상의 도상문제는 학계에서 여전히 이견이 있다. 보물지정명은 ‘석조미륵보살상’으로 돼 있지만 도상학적 근거로 관음보살상이란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사적비에 묘사된 화광(火光)이 5척, 작은 금불이 3척5촌이고 손에 연화가지를 들었다는 구절을 근거로 보관에 화불이 있고, 연꽃을 든 관음보살로 보는 것이다. 도상학적 근거는 차치하고 오랜 시간 ‘미륵보살’로 신앙돼 왔다. 비바람에도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귀의처가 돼 줬음을 알 수 있다.

[불교신문 3363호/ 2018년 1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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