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절과 그 속에 담긴 의미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연기의 가르침을 깨닫고 행복한 삶을 제시했다. 사진은 2017년 대전에서 봉행된 성도절 행사 모습.

모든 존재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연기적인 존재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
공동체적 삶의 가치 부각

오는 24일은 석가족의 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신 성도절이다. 불교의 4대 명절로 불자들이 기리고 있는 성도절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새겨본다.

보리수 아래서 선정에 듦

성도절에 대한 내용은 <숫타니파타>를 비롯한 부처님 생애에 관한 여러 경전에서 나온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6년 동안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었다.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태자가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고자 할 때 마왕 파순이 온갖 방해와 심술을 부리면서 마왕의 세 딸을 태자에게 보내 온갖 유혹을 했으나 태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몸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악이 가득해 견고하지 않고 부정이 흘러 생로병사가 항상 따른다. 손에는 팔찌, 귀에는 귀고리를 흔들면서 교태 섞인 웃음으로 탐욕의 화살을 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들의 욕망을 독약으로 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으니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넘었다. 너희들은 모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물러가거라”라고 호통친다.

마왕 파순은 화가 나서 태자에게 태풍, 폭우를 보내고 창, 칼, 불화살, 돌, 을 던지며 악귀를 보내 수행을 방해 했으나 그 모든 것이 부처님 앞에서 꽃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그래도 안 되자 마왕 파순이 직접 태자 앞에 나타나서 조롱했다.

“석가족의 아들 고타마여! 그대는 속히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그대에게는 전륜성왕의 지위가 보장되어 있지 않는가? 이제 곧 가서 세간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어 그들을 지배하고 오감의 쾌락이 주는 미묘한 맛을 마음껏 즐겨라. 석가족의 아들이여! 그대가 추구하는 도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로만 더할 뿐임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태자는 마왕을 향해 준엄한 사자후를 한다. “게으른 자의 무리여, 사악한자여, 그대가 여기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가 말하는 그 좋은 공덕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은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나는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악마여, 사람들도 저 신들 마저도 그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없지만 나는 지혜의 힘으로 그대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굽지 않은 질그릇을 돌로 쳐 깨뜨리듯이”

마왕 유혹 뿌리치고 正覺

선정에 든 싯다르타 태자는 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마침내 부처님이 된다. 태자는 부처님이 되신 후 마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게송을 남긴다.

“세상에서는 무기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나 나는 중생을 평등하게 여기는 까닭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평등한 행과 인자한 마음으로 악마를 물리쳤나니...” <수행본기경>

‘부처님이 되신’ 이 날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날이 바로 성도절(成道節)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음력4월 8일을 가장 큰 명절로 생각하고 있지만 어쩌면 ‘부처님이 되신 날’인 역사적인 성도절을 가장 큰 명절로 볼 수도 있다.

불자들이 흔히 찾는 법당인 대웅전에 가면 석가모니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다. 이 불상의 수인(手印)을 보면 왼손은 가부좌한 발위에 올려 놓고 오른손은 무릎위에서 아래로 땅을 향하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왕을 항복시킨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태자에서 부처님이 된 내용은 무엇일까. 태자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모습을 <소부경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이루신 세존께서는 한때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의 보리수 아래 머물러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한번 결가부좌하신 채 이레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시며 앉아 계셨다. 이레가 지난 다음 세존께서는 그 정(定)에서 깨어나, 초저녁 무렵에 다음과 같이 차례대로 연기(緣起)의 법을 관(觀)하시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며...”

이것은 아마도 최대한 장엄한 말로 기록된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부처님의 모습은 치열하게 수행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인간 최고의 즐거움인 ‘지혜의 환희’에 잠겨 있는 이미지다. 여기에 발견되는 부처님의 모습은 사유하는 인간의 즐거움을 보여주고 있다.

상의상관 연기법 깨우쳐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깨닫고 대 자유를 얻었다. 구체적 내용은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연기법(緣起法)이었다. 이 연기법(緣起法)은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 따라 생겨남의 준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연기적인 존재임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적 삶의 가치가 부각된다. 부처님이 깨달은 성도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물망처럼 인연 지어져 있는 공동체적인 운명의 가지고 있으니 나와 남은 둘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12연기까지 관찰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상응부경전>의 ‘대석가모니구담’에는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나는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정념(正念)하여 이렇게 생각했었다. 참으로 이 세상은 괴로움에 빠져 있다. 태어나고 늙고 쇠해지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면서도 이 괴로움으로부터 떠날 줄 모르고 노사(老死)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참으로 언제가 돼야 이 괴로움과 이 노사로부터 떠나는 방법을 알 수가 있을 것인가. 비구들이여.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그때 나에게 바른 사유와 지혜에 의해 해결이 생겨났었다. 생(生) 있으므로 말미암아 노사가 있다.”

<율장> 대품의 첫머리도 부처님은 연기법을 순역(順逆)으로 생각했다.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행(行), 행에 말미암아 식(識), 식에 말미암아 명색(名色), 명색에 말미암아 육처(六處), 육처에 말미암아 촉(觸), 촉에 말미암아 수(受), 수에 말미암아 애(愛), 애에 말미암아 취(取), 취에 말미암아 유(有), 유에 말미암아 생(生), 생에 말미암아 노사와 수(愁), 비(悲), 고(苦), 우(憂), 뇌(腦)가 생긴다. 이리하여 이 모든 고온(苦蘊)이 생긴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이룬 깨달음은 상대주의의 존재론이다. 6세기 초 그리이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흘러간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만물은 운동 속에 있다”고 했다. 부처님 또한 유전하는 존재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모두가 그럴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니 그것들 또한 그럴만한 조건이 없어지면 그 존재도 있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존재들은 당연히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무조건적인 것은 없다고 정의한다.

전 인류에 행복한 삶 제시

부처님의 이러한 위대한 깨달음은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관돼 있기에 ‘나와 남, 즉 이웃은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나의 행복은 일체중생의 행복이니 서로 갈등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서로 화합하고 어울리는 공동체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개인주의와 파편화된 현대사회에 부처님이 깨달은 상의상관의 연기법은 서로 증오나 갈등하지 말고 화합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러한 성도절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부처님 오신날’만큼 불자들에게, 인류에게 중요한 날임이 틀림없다.

차차석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는 “부처님이 깨달은 가르침은 결국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와 사회문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을 자각하라는 것”이라며 “성도절을 맞이하며 내 마음을 맑히고 사회와 국가를 맑히기 위해 정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수년간 성도절 행사를 다양하게 펼쳐온 평택 명법사주지 화정스님도 “부처님이 깨달아 설파한 위대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불교가 인류의 수승한 가르침이 될 수 있었다”며 “성도절을 어떤 날보다 의미를 두고 불자들은 기려야 할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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