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 중 
어느 것이 이 우선인가를 
놓고 벌이는
그간의 낙태논쟁은 잘못됐다
두 주장은 양극단에서 
서로를 부정해
생명의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낙태죄 폐지 청원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뜨겁다. 청와대가 사회적 대화를 약속했지만, 오랫동안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온 문제인데다 가톨릭, 개신교 등 주요 종교단체들이 완강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불교는 어떤 입장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가는 차원에서 몇 가지 고민을 적어 본다. 

2012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그때도 위헌 대 합헌이 4대 4로 팽팽했다.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의견은 “사익인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보다 크지 않고, 태아도 생명권의 주체로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요지였다. 태아의 생명권을 중시한 입장이었다. 이에 대해 위헌이라는 의견은 “임신 초기 자발적 임신중절까지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여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했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인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우선인가는 그동안 이 논쟁의 주요 초점이었다. 두 견해 가운데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주장은 태아가 여성과 별개의 생명체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不一). 반대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는 시각에는 뱃속의 태아는 여성 몸의 일부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不二).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과연 타당한가? 불교의 생명관으로 보면 태아와 여성은 분리될 수 없는 연기적 관계다. 태아는 여성에 의존할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여성 또한 태아와 절대적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연기적 실상을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한다. 태아와 임부는 동일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개의 생명체로 존재하지도, 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둘은 하나다, 둘은 별개다라는 양극단의 입장에 서서 한쪽을 부정하는 식의 논쟁은 생명의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태아와 여성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분리될 수 없는 것들을 분리하여 둘 가운데 무엇 하나를 우선하려는 낙태죄 논쟁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낙태 문제를 푸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붓다께서 주목하셨던 ‘고의 해결’ 관점에 서는 것이 좋은 방안이 아닐까 싶다. 앞서 태아와 여성을 존재론적으로 분리할 수 없듯이 고통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실 태아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낙태를 할 때 가장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 또한 여성이다. 마치 제 생명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큰 고통이 있을 것이다. 낙태반대론자들은 낙태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감내하는 이가 여성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낙태 허용론자들은 태아도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라는 사실에 눈감지 말아야 한다. 내 안에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고 하여, 함부로 다뤄서는 안되며, 임신중절이 줄어들고 없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낙태라는 인간적·사회적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지, 무엇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여성의 고통, 태아의 고통을 함께 줄이고 없애는 쪽으로 사회적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주된 기준이 된다면 찬반양론을 넘어 합리적인 해결책이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불교 입장에서 생명은 연기의 관점에 확고히 발을 딛고 보아야 한다. 또한 붓다가 독화살의 비유에서 밝혔듯이 고의 발생과 소멸의 관점에서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종단 차원에서 생명윤리연구를 본격화한다고 하니, 무엇이 본이고, 무엇이 말인지를 잘 세워 세상을 돕는 지혜로운 방안이 도출되면 좋겠다.

[불교신문3361호/2018년1월17일자] 

정웅기 논설위원·생명평화대학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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