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말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그리고는 주(註)를 달아 묻고 답했다.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다면 한 물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름붙일 수 없고 모양그릴 수 없기에 어떠한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고, 어떠한 모양으로 그려도 상관없다. 하필 원상(圓相) 뿐이겠는가?

학의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으며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었다. 모든 모양이 원래 참다운 모양이니, 소 부처와 말 부처, 남자 부처와 여자 부처가 서로서로 빌리지 않고도 각자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두두 물물이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아다니는 것은 마치 바다 속의 물고기가 바다를 찾아다니는 것과 같으며, 허공을 나는 새가 허공을 찾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바로 지금 여기서 생명의 기쁨을 체험하면 그뿐이다.

불성은 은밀히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 드러나 있는 현실이다.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가 불성의 드러남이다. 몸은 변화한다. 마음도 변화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관찰자는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하지 않으므로 존재여부를 알 길이 없다. 존재여부를 알 길이 없으므로 몸과 마음을 드러내어 알게 한다. 불성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하는 모든 것은 불성의 드러남이다. 

걸어가면 ‘걸어간다’, 머무르면 ‘머무른다’, 앉았으면 ‘앉아있다’, 누웠으면 ‘누워있다’, 관찰하자. 태어나면 ‘태어났다’, 늙어가면 ‘늙어간다’, 병이 들면 ‘병들었다’, 죽어가면 ‘죽어간다’, 관찰하자. 이것이 몸에 대해 몸을 보는 몸 해탈이다.

탐이 나면 ‘탐이 난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 근심 걱정이 일어나면 ‘근심 걱정이 일어난다’, 관찰하자. 이것이 마음에 대해 마음을 보는 마음 해탈이다. 

새해에는 몸과 마음 해탈하자. 관찰자로 살자.

[불교신문3361호/2018년1월17일자] 

월호스님 논설위원.행불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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