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면 상록수와 
활엽수가 확연히 구분되고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라니

감사하고 안부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

어둠에 가려있던 별 하나가 달빛에 젖어 흐른다.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흐르고 변하지 않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나는 새해의 다짐을 위해 손바닥을 펴 엄지부터 검지 중지까지 접는다. 그 찰나에 갑자기 불어오는 찬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면서 며칠 전에 보낸 친구의 얼굴이 스쳐지나가고 연이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폐암으로 떠났다는 급작스런 친구의 부고를 받고 찾아간 영안실은 너무나 썰렁했다. 한 때 잘 나갔던 기업 총수의 며느리로 군림했던 친구의 죽음은 무척 초라해 보였다. 살아생전 동창생들 중 그 누구라도 어렵다는 말만 들어도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던 마음씨 착한 우리들의 기둥이었건만, 시아버지 회사의 부도와 시어머니의 투병생활 도우미로 그녀의 모습은 우리들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그런 세월이 겨우 7년여, 결코 길지 않은 세월동안 우리들은 모두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나는 차마 영안실을 뒤로 하고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아들의 눈초리가 나를 붙잡고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내 등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 많던 엄마의 친구들은 어딜 갔느냐고 내게 묻는 것처럼. 친구의 죽음보다 더 가슴절인 우리들의 배신 앞에서 내 가슴을 짓누르는 이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은행에 걸려있던 추사의 세한도가 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고 나서야 친구라는 존재 가치를 알게 되었다. 평소 추사 주변에 시끌벅적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람들이 막상 그가 유배지로 떠난 후에는 그를 찾아가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오래 전 중국 사절로 함께 동행 했던 '이상직'이란 선비가 소식을 인편에 전해 왔다. 그는 중국에서 많은 책을 구입해서 추사의 유배지인 제주도까지 그 책들을 전한 것이다.

극도의 외로움과 어려운 시련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 있던 추사에게 그의 선물은 감동이고 위로였다. 추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상직의 우정에 감사하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너무도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인 것이다. 세한은 <논어>의 한 구절 “날씨가 차가워지고 난 후에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는 뜻이다.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모든 나무가 푸르지만 날씨가 차가워지는 늦가을이 되면 상록수와 활엽수가 확연히 구분된다. 친구 관계 또한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 없음을 추사 역시 깨달았던 것이다.

밥은 먹을수록 살이 찌고 돈은 쓸수록 아깝고 나이는 먹을수록 슬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있고 그리워 할 수 있고 안부를 묻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나는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빙긋 웃으며, 엄지손가락만 접었다. 새해 소망은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에 밤하늘의 별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다. 늘 반겨주는 별이 있어서….”

※ 필자는 숙명여대 작곡과를 졸업, 1990년 계간 <문학의식>에 등단했으며 <고엽> <역마살이 낀 여자> 등 다수의 작품을 저술했다. 

[불교신문3361호/2018년1월17일자] 

안혜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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