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토(韓土)의 수천 승려는 독립을 선언하노라”

해방 후에 귀국한 백범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12일 서울 대각사를 방문해 동암스님 등 불교계 인사들과 오찬을 같이하고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조소앙, 이시영, 김구, 회암스님, 동암스님. 하단에 '대한민국 림시정부 봉영회 긔념. 1945.12.12'라고 적혀 있다.

공약삼장은 ‘불살생 정신’ 
탑골공원 만세운동 동참
지방 내려가 시위 ‘주도’
해외에서도 적극 활동해

1919년 3월1일. 일제의 강점에 맞서 조선인들은 분연히 일어나 자주독립을 목청껏 외쳤다.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며, 지금까지 헌법에 ‘3.1 정신 계승’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3.1운동과 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을 한 해 앞두고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살펴보는 기획기사를 격주로 연재한다.

1919년 3.1운동은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 종교계가 적극 주도한 독립운동이다. 불교에서는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이 민족대표로 참여했다. 한용운 스님은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직접 썼다. 학계 일부에서는 최남선 등이 서술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만해스님이 쓴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많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2001년 <불교평론>에 게재한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집필자에 대한 고찰>에서 “자유와 비폭력을 골자로 하는 ‘공약삼장’은 불교의 해탈, 불살생, 보편 도덕주의 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따라서 이 같은 ‘공약삼장’의 필자는 만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힌 바 있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1920년까지 경성(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와 조선인이 거주하는 세계 도처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삼일 만세운동, 기미독립운동으로도 불리는 3.1운동은 20세기 전반기 세계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불교계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일 탑골공원에서 열린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이후 거리 행진에 나섰다. 서울 위주의 한계를 뛰어넘어 청년승려들이 각자 연고가 있는 지방으로 달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 학생과 청년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김용사, 마곡사, 쌍계사, 화엄사, 선암사, 송광사 등에서 해당 사찰 스님, 지역 주민들과 연대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남양주 봉선사와 부산 범어사 청련암은 3.1운동 만세시위를 모의한 장소이고 , 대구 동화사 포교당 터와 합천 해인사 일주문은 만세운동을 결행한 곳이다. 3.1운동 후에도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일제에 맞서 조국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지사들의 공간으로 활용됐다. 1937년 춘천농업학교 학생운동이 진행된 곳이 춘천 청평사이고, 철원 애국단이 결성된 장소가 철원 도피안사이다. 독립대동단이 활동한 사찰이 월정사이며,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가 만들어진 곳이 대구 안일사이다.

불교계 인사들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외연을 확장하기도 했다. 3.1운동이 국내에서 한계에 부딪히면서 장기적인 항쟁을 준비하는 노력이 이어졌다. 1919년 11월15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는 대한승려연합회 명의로 선언서(승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에는 범어사와 통도사 등 주요 사찰의 중진급 스님들이 비록 가명이지만 서명해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대한승려연합회는 “한토(韓土)의 수천 승려는 2천만 동포와 세계에 대하야 절대로 한토에 있는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함을 자(玆)에 선언하노라”고 당당히 밝혔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만해스님이 머물던 서울 성북구 심우장 앞 공원의 만해스님 동상.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 밀항을 시도한 불교계 인사도 여럿 있다. 신상완, 백성욱, 깁법린, 김대용 등은 1919년 4월 하순 중국으로 건너갔다. 보름 정도 뒤에는 김법린과 김대용이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활약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들은 조선의 지인들과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쌀가게로 위장한 동광상점(東光商店)을 내어 임시정부와 연결 통로로 활용했다. 김법린은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와함께 불교계는 3.1운동을 계기로 비폭력 독립운동과 더불어 무력 투쟁도 고민했다. 의용승군(義勇僧軍) 조직을 계획하는 한편 청년승려 박달준(朴達俊), 김봉률(金奉律), 박영희(朴暎熙) 등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자원 입학했다. 1920년 1월 하순경 조직된 의용승군은 총령부(總領部)를 중심으로 산하에 비서국, 참모부, 국무국, 군수국, 사령국으로 편제했다. 총령부는 대한승려연합회장을 총장으로 하도록 했다.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구체화 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나라 찾기 위해 ‘항쟁’
독립운동 사실 재조명

3.1운동 보다 한해 앞선 1918년 10월 제주 법정사에서는 김연일, 방동화 스님 등이 400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무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호국불교(護國佛敎)와 의승병(義僧兵)의 변함없는 전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인물로는 백용성, 한용운, 백초월, 오성월, 김구하, 박영희, 이종욱, 신상완, 김상호, 이고경 스님 등 다수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이 가운데 일부는 지조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친일(親日)의 길을 걸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3.1운동 이전인 구한말에는 의병들이 사찰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삼았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이후 전국에서는 의병 활동이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강화 전등사, 연천 심원사, 양평 상원사, 구례 연곡사, 하동 칠불사, 순창 구암사, 상주 청계사, 안동 봉정사 등 경향 각지의 사찰이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일본은 의병을 ‘비적(匪賊)’이라 폄하하고, 토벌을 명분으로 사찰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교수와 혜화전문 교장을 지낸 다카하시 토루(高橋亨) 조차 임진왜란 당시 병화(兵禍)와 더불어 을사늑약 이후 2년 간의 사찰 피해를 ‘이대재액(二大災厄)’이라고 했을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다.

1940년대에 이르러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을 일으킨 일제의 침략 정책은 더욱 노골화됐다. 장정들의 강제징용은 물론 소녀들의 위안부 동원으로 한반도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 무렵 항거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앞장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고, 징용에 나갈 것을 독려한 일부 불교계 인사들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매년 3.1절 기념행사와 독립운동가 초월스님 추모법회를 봉행하는 서울 진관사. 2011년 법회 동참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이다.

2017년 6월말 현재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불교계 인사는 84명에 이른다. 많은 숫자는 아니다. 이 가운데 국내 항일 45명, 3.1운동 30명, 임시정부 3명, 의병 2명, 만주 2명, 중국 1명, 의열 투쟁 1명이다. 좀 더 정밀한 자료수집과 조사로 독립운동 유공자를 확인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본지는 3.1운동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격주로 기획기사를 보도한다. 3.1운동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독립운동의 자취를 살필 예정이다. 그동안 많이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은 보완 취재하여 재탐색하는 한편 미공개 미발굴 기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기사 내용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현장 취재를 진행하는 동시에 학자들의 고견을 청취하고, 논문과 저술, 그리고 국내외 기록관의 자료 등을 참고해 보도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의 암흑기에 불교계가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했는지 조명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불교 가르침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면면히 이어갔음을 확인하려는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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