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이 스님이 사는 법] 흑산도 유일사찰 칠락사 대지스님

“흑산도에 오직 한 분” ‘터미널 스님’으로 불리면서 여객선 선착장 탁발염불로 2년 전 조립식으로나마 법당불사를 회향한 칠락사 주지 대지스님. 지난 12월9일 만난 올해 일흔넷의 스님은 자나깨나 밤낮없이 기도정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칠락사에 해수관음상이 모셔지는 그날까지 간절한 기도정진 뿐.

2009년 낯선 흑산도에 걸망 풀고
‘터미널 탁발’로 요사채 법당불사
마지막 해수관음보살 봉안 원력
바다 지키고 중생 보듬는 부처님

요사채 한 칸에 어렵사리 부처님을 모시고 홀로 정진하며, 매일 아침 여객선 선착장서 ‘법당 불사’ 모연을 위해 ‘탁발 염불’을 마다않던 흑산도 유일사찰 칠락사(조계종 제22교구본사 대흥사 말사) 주지 대지스님. 자전거 타고 인력거를 끌면서 선착장 주변을 치우고 관광객과 도민들에게 솔잎차를 보시하고 염불하면서 ‘터미널 스님’ ‘인력거 스님’으로 불렸던 대지스님은 올해 세수 일흔넷이다. 이제 무거운 인력거를 끌 힘도 부치고 터미널을 청소할 기운도 없다. 2009년 흑산도에 걸망을 풀자마자 시작한 탁발로 3년여만에 다 무너져가는 절터에 요사채를 세웠던 스님이다. 

흑산도 도민은 물론 흑산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여법한 부처님 도량을 선사하고 싶었던 스님은 지난 2016년 3월 65평 규모의 대웅전을 마침내 문열었다. 법당 불사 모연이 한창이던 2012년 12월, 불교신문 취재진이 찾았을 때만도 너무나 가난하고 연약한 비구니 스님이 과연 탁발로 법당불사를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십시일반으로 이루지 못할 일은 없었다. “컴컴한 흑산에 부처님 자비광명을 비춰달라(불교신문 2877호 기사)”는 스님의 간절한 기도와 서원은 불교신문 독자와 전국의 스님들, 그리고 소식을 전해들은 불자들이 마음을 보태면서 현실이 됐다. 사람들 발길이 갈수록 잦아드는 흑산에 교회와 성당은 눈만 뜨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판인데, 유일무이한 불교도량에 부처님 모실 법당이 없다니, 당시 불교신문 편집국에는 안타까움을 확인하고 호소하는 전화가 쇄도했다. 

“얼매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더. 별다른 인연도 없는 스님과 불자들이 신문기사를 봤다면서 관심과 애정을 보내줬지예. 그분들 덕분에 그야말로 꿈처럼 법당이 생긴 거라예.” 스님의 간절했던 꿈의 도량, 칠락사 대웅전은 사실 조립식 건축물이다. 나무와 흙으로 여법한 법당을 짓기엔 예산이 턱없이 모자라서 택한 방식이다. “조립식이면 어때예? 법당 생기고 너무 좋아서 날마다 법당서 살다시피 했어예. 입이 닳도록 염불기도 하면서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목탁소리라도 마음껏 들려주려고 밤낮없이 정진하고 또 정진했습니더.” 

칠락사 대웅전은 스님의 손때가 묻어있고 기도정진의 원력이 깃들어 세상 가장 훈훈하고 포근한 기운이 맴돈다. 말그대로 ‘부처님 품’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도량을 찾는 이들이 별로 없다. 대지스님이 칠락사에 머물기 전, 숱한 스님들이 오며가며를 반복했고, 갈 때마다 한 트럭씩 살림살이를 실어갔다는 믿기 어려운 풍문들도 도민들이 칠락사에 발을 끊은 데 한몫했다.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10여년째 굳건하게 버티고 사는 대지스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제야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흑산에 젊은이들이 많지도 않은데다 연세 90이 넘은 노보살님 몇 명이 신도라면 신도랍니다. 그래도 초하루가 되면 행여 누가 올까봐 나물도 무쳐놓고 공양준비도 해놓지만 아무도 오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지요. 제가 온 뒤에 돌아가신 보살님도 몇분 계시고 그 분들 위패 모시면서 자녀분들이 가끔 들러줘요. 절에 누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거동이 힘들고 죽음이 코앞인 어르신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말동무도 해드리고 반찬도 만들어다 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저에겐 수행이자, 포교라예. 호호.” 

대지스님은 조립식으로나마 법당이 생겨 감사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또 하나의 원력’을 조심스레 세우고 있었다. 흑산을 지키고 흑산도를 대표하는 해수관음상 봉안이다. “사면이 바다인 흑산도에 모든 생명들이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기를 발원하는 마음으로 해수관음을 모시고자 한다”는 모연문이 도량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흑산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칠락사와 함께 해수관음상이 봉안돼 있다면 참배객들의 기도처로서 역할을 할 것이란 게 스님의 생각이다. “남해 보리암이나 양양 낙산사와 같은 도량에 바다를 바라보는 해수관음상이 있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기도처이자 안식처가 됩니껴. 흑산도 유일 사찰에 해수관음상을 모실 수만 있다면 내사 고마 눈감아도 여한이 없어예.” 

대지스님의 원력을 전해듣고 보리암에 해수관음상을 봉안한 불상조각가가 흑산도 칠락사를 답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칠락사 도량이 너무 협소해서 기도공간을 갖춰야 하는 해수관음상 봉안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도량 인접한 땅 300여평을 매입해서 공간을 확보하려 시도했지만, 땅주인이 쉽사리 땅을 내놓지 않는 상황이다. 마을 안쪽에 있는 칠락사 입지를 탓하면서 아예 바닷가쪽 고려시대 절터 무심사지(전남문화재자료 제193호)에 해수관음상을 크게 세우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국유지로 묶여 있어 불사를 하기엔 절차상 어려움이 많다. 대지스님은 “해수관음상을 모시는 일도 적지않은 불사금을 필요로 하는데, 다소 소박한 규모라도 칠락사에 모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며 “해수관음상이 보이면 육지서 먼 길 달려온 관광버스도 잠시 멈춰 설 수 있을 것이고, 불자들은 흑산 해수관음상을 참배하면서 자부심과 환희심이 절로 날 것”이라고 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스님의 하루에 유일한 여가는 사찰 뒷산 칠락봉을 포행하는 일이다. 자그마한 텃밭에 날마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을 뽑는 운력 역시 스님의 일상에 활력을 준다고 한다. “칠락봉에 올라 서서 우리절 칠락사를 바라보면, 봐도 봐도 눈물이 납디다. 이제 내도 다리도 아프고 무릎도 절이고 치아도 닳고 눈도 어둡고 떠날 날이 머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해수관음보살님을 모시고 칠락사가 많은 중생들의 복전이 돼준다면 을매나 좋을꼬, 을매나….” 대지스님은 오늘도 조립식 법당에 불을 켜 놓은채 밤을 지새운다. 흑산의 매운 칼바람으로 법당 처마 풍경 속 물고기가 벌써 세 번이나 날아갔지만 스님은 또다시 새 풍경을 걸어놓고 쟁쟁 울리는 풍경소리 맞춰 목놓아 염불을 한다.

기도정진 뿐인 대지스님의 일상에서 유일한 여가중 하나는 텃밭가꾸기다.

홍도에는 사찰이 하나도 없다?

흑산도 칠락사 더욱 귀해 

불자들은 해외여행길에도 사찰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으로 참배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부처님을 만나면 어디서나 부처님이 자비광명을 비추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인해 심신에 큰 위안이 된다. 한정된 배편과 기상여건에도 연간 15만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찾는 홍도는 목포항에서 뱃길로 2시간 걸리는 흑산도보다 30여분 더 들어가야 닿는다. 많은 관광객들이 기상악화와 배멀미 등으로 홍도를 포기하고 흑산에 하선하는 경우가 잦다. 흑산도에 유일한 사찰 칠락사가 있는 반면 홍도에는 사찰이 하나도 없다. 또한 흑산도 인근에 있는 도초도에는 백양사 말사로 등록된 만년사가 유일하게 사찰로서 역할을 하고 있고 비금도에는 서산사 법화정사 등이 있지만 미타신앙 산신신앙 등이 결합된 형태로 있어 일반적인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불교신문3358호/2018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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