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마음은 오랜 세월 
믿음으로 굳건해지고 
계행과 배움과 보시와 
올바른 지혜로 굳건해졌다
믿음과 계행, 보시와 지혜를 
구족한 제자는 
열반으로 들어갈 것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이 따뜻한 위로의 말씀은 
참으로 가슴을 울린다 

마하나마는 비두다바가 
카필라왓투를 점령하고 
석가족을 몰살하려 했을 때 
자신의 백성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 

새천년이 시작된 2000년대 초반, 세상에는 웰빙 열풍이 불었다. 경쟁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행복한, 스스로가 만족하는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부터는 죽음을 앞두고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며 존엄하고 평안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웰다잉’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부처님의 재가제자 중에서도 웰빙과 웰다잉을 화두로 삼고, 끊임없이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 가르침을 구한 이가 있었다.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자 석가족의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가 그 주인공이다. 

출가하지 못한 석가족 왕자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석기족의 태자라는 지위를 버리고 왕궁을 떠나 스스로 출가의 길을 선택했을 때 부처님의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로부터 6년 후,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중생제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7년이 지나서야 부처님께서는 아버지 숫도다나왕과 아내 야소다라, 아들 라훌라를 비롯한 친족들이 있는 고향 카필라왓투로 가셨다. 13년 만에 고향을 방문하신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해, 이복동생 난다와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이듬해 석가족의 일곱 왕자가 부처님의 출가 제자가 되기 위해 카필라왓투를 떠나 죽림정사를 찾아왔다. 

죽림정사를 찾은 석가족의 일곱 왕자 중에는 훗날 25년 동안이나 부처님을 시봉한 아난존자가 있었고 시력을 잃은 대신 천안통을 얻은 아누룻따존자도 있었다. 이들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었데 아누룻따존자의 친형이 바로 마하나마이다. 그는 부처님께서 석가족을 위해 법문을 하셨을 때 수다원과를 성취하였고 삼보에 귀의한 후 사다함과를 성취하였다. 누구보다 깨우침이 빨랐던 마하나마는 출가를 간절하게 원했다. 하지만 동생 아누룻따로 인해 카필라왓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마하나마와 달리 화려하고 안락한 생활에 익숙했던 아누룻따는 소박한 옷을 입고 탁발로 음식을 구하며 여러 스님들과 함께 사원에서 지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장차 왕위에 올랐을 때 책임져야 할 여러 의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왕이 되었을 때 해야 할 속세의 일들이 너무나 많고 힘들어보였기 때문이다. 아누룻다가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왕궁에 남게 된 마하나마는 결국 숫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난 후 석가족 최후의 왕이 되었다. 

재가제자들을 위한 질문 

마하나마는 석가족의 왕이라는 막중한 자리로 인해 비록 출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신실한 재가제자로서 부처님과 교단을 받들었다. 그는 부처님과 스님들이 카필라왓투에 오시면, 머무는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공양을 올렸고 날마다 부처님을 찾아가 궁금한 것들을 묻곤 했다. 마하나마의 질문은 재가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정말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재가제가가 되려면 어떠한 능력을 지녀야 합니까?”

“마하나마여, 삼귀의를 잘 지니는 것이 재가제자가 되는 길이다.” 

“부처님, 신심 있는 재가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나마여, 깨달음의 지혜를 믿는 것이 신심 있는 재가제가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 보시할 수 있는 신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나마여, 가정을 이끌어 가는 일에 인색함 없이 지내며 보시하는 것을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이 보시할 줄 아는 신도이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란?

어느 날 부처님께서 카필라왓투에 머무셨을 때, 마하나마는 500명의 재가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예배를 올린 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깨달음의 단계인 수다원과 사다함, 아나함의 차이를 여쭤보았다.

“부처님, 재가제자 중 우바새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마하나마여, 우바새란 집에서 깨끗하게 살면서 ‘목숨을 마칠 때까지 삼보에 귀의하여 우바새가 되겠나이다. 나를 증명하여 주소서’라고 한 이들이다.”

“부처님, 우바새의 수다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마하나마여, 우바새의 수다원이란 세 가지 결박을 끊고, 끊을 줄 아는 것이다. 세 가지 결박이란 몸에 대한 삿된 생각과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의심이다. 이것을 끊고, 끊을 줄 아는 것을 우바새의 수다원이라고 한다.”
 “부처님, 우바새의 사다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마하나마여, 우바새의 사다함이란 세 가지 결박을 끊고, 끊을 줄 아는 것이다. 세 가지 결박이란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다. 이것을 끊고, 끊을 줄 아는 것을 우바새의 사다함이라고 한다.”
 “부처님, 우바새의 아나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마하나마여, 우바새의 아나함이란 다섯 가지 결박을 끊고, 끊을 줄 아는 것이다. 다섯 가지 결박이란 몸에 대한 삿된 생각과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과 의심 그리고 탐욕과 성냄이다. 이것을 끊고, 끊을 줄 아는 것을 우바새의 아나함이라고 한다.”

말먹이 보리를 드신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마하나마에 대하여 가장 뛰어난 보시를 했다고 칭찬을 하셨다. 수많은 왕과 부유한 장자 가족으로부터 여러 보시를 받으셨던 부처님께서 마하나마의 보시가 가장 뛰어났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께서 500명의 제자들과 안거를 보내실 때 공양을 제대로 하지 못해 크게 고생을 하신 적이 있었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과 스님들을 초대하여 안거기간 동안 공양을 올리겠다고 청하고는 이를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을에는 기근이 들어 부처님과 스님들이 마을에서 탁발을 해도 쌀 한 톨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부처님과 스님들이 머무는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말 상인이 500마리 말을 먹이기 위해 가져온 보리를 스님들께 나눠주었다. 그 해, 부처님과 스님들은 말먹이 보리를 먹으며 안거를 보냈다. 뒤늦게 자신의 불찰을 깨달은 바라문이 다시 한 번 공양을 올릴 기회를 청하였으나 부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신 뒤 제자들과 함께 카필라왓투로 가셨다. 상황을 알게 된 마하나마는 부처님과 스님들의 건강을 회복시켜드리기 위해 넉 달 동안 공양을 올렸다. 이때 그는 최상의 버터를 비롯하여 여러 귀한 약재들도 함께 공양을 올렸다. 

넉 달이 지나자 마하나마는 다시 넉 달 마음껏 보시를 올릴 것을 허락받았고 다시 넉 달이 지나자 평생 동안 공양을 올릴 것을 청했다. 마하나마의 보시 덕분에 말먹이 보리를 먹으며 건강이 나빠졌던 부처님과 스님들은 기력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진귀한 재료로 최상의 공양을 올렸기에 부처님께서 이를 칭찬하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질문

마하나마가 부처님께 드린 마지막 질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바쁜 일상 속에서 더러 마음을 챙기지 못하고 삼보를 잊게 되는 것을 고백하여, 그때마다 죽음이 두렵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마하나마를 따뜻하게 위로하며 말씀하셨다.

“마하나마여,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의 죽음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오랜 세월 믿음으로 굳건해지고 계행과 배움과 보시와 올바른 지혜로 굳건해졌다. 그러므로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의 뿌리를 자르면 동쪽으로 넘어지는 것처럼 믿음과 계행, 보시와 지혜를 구족한 제자는 열반으로 기울고 열반으로 향하며 열반으로 들어갈 것이다.”

부처님께서 마하나마에게 한 이 따뜻한 위로의 말씀은 참으로 가슴을 울린다. 왜냐하면 마하나마의 죽음은 실로 고결했기 때문이다. 그는 비두다바가 카필라왓투를 점령하고 석가족을 몰살하려고 했을 때, 한 명의 백성이라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마하나마는 자신의 손자인 비두다바에게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 숨을 참고 있는 동안이라도 백성들이 도망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비두다바가 오만한 얼굴로 이를 허락하자 마하나마는 지체 없이 연못에 몸을 던졌고, 가장 튼튼한 연꽃 뿌리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단단히 동여맸다. 마하나마는 그렇게 연못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하나마의 죽음을 끝으로 카필라왓투는 멸망했고 석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나쁜 죽음이 아니었다. 부처님께서는 아마도 마하나마의 죽음이 어떤 모습일지 이미 아셨기에 그를 위로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삶이 웰빙이며, 어떠한 죽음이 웰다잉인가.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 답을 알고 계셨고 끊임없이 이를 가르쳐주셨다. 부처님의 제자인 우리도 이 가르침을 삶과 죽음 속에서 실천해야하지 않을까. 

[불교신문3357호/2017년12월27일자] 

글 조민기  삽화 견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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