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은 이해 아닌 실천덕목

훌륭한 진리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처방전만 갖고 약은 먹지 않는 격 
자유로워지려면 지견 내지 않아야 

“수보리여,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나라는 견해·중생이라는 견해·사람이라는 견해·목숨이라는 견해를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수보리여, 그대의 뜻에는 어떠한가? 이 사람이 내가 말한 뜻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견해·중생이라는 견해·사람이라는 견해·목숨이라는 견해는 곧 나라는 견해·중생이라는 견해·사람이라는 견해·목숨이라는 견해가 아니라고 하셨으며 그 표현이 나라는 견해·중생이라는 견해·사람이라는 견해·목숨이라는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모든 가르침을 대함에,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며 바르게 믿고 이해하여 ‘가르침이라는 관념’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여, ‘가르침이라는 관념’이라고 말한 것은 여래가 ‘가르침이라는 관념’이 아닌 것을 말함이며, 그 표현이 ‘가르침이라는 관념’이니라.”

제31분에서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말씀하셨다. 바로 앞에서는 가르침의 본질에 대한 분석적 접근과 총체적 접근의 문제를 살폈다면, 여기서는 가르침을 받는 이가 도달해야 할 마음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이 ‘관념(相)’임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 구마라집 역본에서는 네 가지 관념(四相)을 들고 있지만 범본(梵本)에는 더 많은 관념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이 고정관념이라는 뜻이다. 이 고정관념(相)은 개개인이 가진 색안경과 같아서, 각자의 마음에 왜곡현상을 일으키어 개개인의 괴로움을 만든다. 

그런데 이 고정관념에 의해 왜곡된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서 타인까지도 괴롭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타인을 지혜로운 삶으로 인도해야하는 ‘보살의 삶’과는 정반대가 되어 타인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괴로워진 타인들에 의해 자신의 괴로움도 더욱 커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해탈에 이르고 타인을 해탈시키려면 일체의 관념(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왜곡된 견해를 내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몸에 병이 생겨 고통스러운 사람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처방전을 받는다. 하지만 처방전 자체는 병을 낫게 하지 못하기에, 처방전을 아무리 잘 보관하고 있어도 병의 고통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약사로부터 약을 받아야 하는데, 이 약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병을 낫게 하지 않는다. 환자가 그 약을 직접 복용하여 병을 다스려야 한다. 비록 훌륭한 의사를 만나 처방을 받고 뛰어난 약사를 만나 약을 받아도, 환자 자신이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금강경>에서 ‘모든 관념(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는 가르침을 만난 것은 훌륭한 처방전을 받은 셈이다. 다음으로 관념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 굳어지는지를 잘 살피는 것은 약을 손에 넣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관념이 시작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약을 복용하는 것에 해당된다. 그 결과로 완전히 고정관념(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면, 병이 다 나아서 건강을 회복한 것과 같다. 비로소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해탈에 이른 것이며, 본래의 청정한 경지를 회복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곧 진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말씀만을 연구하며 수행을 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전문적인 이론가가 될 수는 있지만 자신은 여전히 온갖 번뇌로 괴로워한다. 이는 뛰어난 의사들로부터 처방전을 많이 받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약을 복용하지 않아 병고가 심해지는 사람과 같다. 

또 하나의 잘못이 있다. 근본불교의 가르침은 간단하여 받아들이기 쉽다는 주장이다. 이것 또한 이해하기 쉽다는 말일 뿐, 실천하여 해탈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 방법으로 수행하는데도 해탈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수행력이 부족하거나, 또는 그 수행법이 최후의 것이 아니라 초기 또는 중간 단계의 것이었음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해할 대상이 아니라 실천할 덕목이다. 

[불교신문3354호/2017년12월16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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