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오랜만에 고등학교 초입에 들어서는 길, 소녀처럼 마음이 설렜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남학생이 하얀 입김을 연신 불어가며 정문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총총 걸음으로 따라 들어가니 넓은 강당에는 20여개의 테이블마다 5~6명 학생들이 ‘사람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포 전 ‘사람책’이 되어 주겠노라 약속을 했던 터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권의 책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만이 경험한 오롯한 삶이기 때문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옹기종기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니 옛 생각에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화롯불을 곁에 두고 할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는데 할매의 따스한 이야기를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곤 했었다. 잠시 후 아이들과 마주 앉아 나의 책을 펼쳤다. 그들은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읽어 주었다. 교회를 다니지만 불교에 관심이 많다는 아이, 스님과 한 번도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어 신청했다는 아이, 스님의 삶과 가치관이 궁금했다는 아이…. 스님인 나를 ‘대출’해 준 것이 고마워서, 마음을 담아 진솔한 이야기를 전했다.

“처음 삭발할 때 어떤 기분이었어요?” “왜 굳이 스님 하셨어요? 그냥 혼자 자유롭게 살면서 불교를 공부해도 되잖아요?” “지켜야 하는 것들이 많아 힘들지 않으신가요?” 참으로 오래 된 질문이었다.

몸에 배인 익숙함에 젖어 애써 살피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었고 무뎌진 숫돌을 향하여 날을 세우게 하는 순수의 질문이었다. 그저 대충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속으로 들어와 한 줄 한 줄 밑줄 그으며 사람을 듣고 있는 듯 했다.

두 시간여 사람책 이야기가 마무리됐고 아이들은 각자 소감을 말했다. “스님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 본 책을 한권 읽은 느낌이에요”, “지금까지 재미로만 책을 선택했는데 이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의 진지함과 통찰이 대견하고 감동스러웠다.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려고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삼동결재 공부꺼리를 얻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던진 ‘뻔한 질문’이 새삼스럽게 되새겨 졌다. 매서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틈새에 바람 들이치지 않도록 재점검하고 매순간 알아차림 해야겠다.

[불교신문3354호/12월16일자] 

일광스님 거창 죽림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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