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을 바탕으로 쉼 없이 정진하라”

관응당(觀應堂) 지수(智首) 대종사는 불교의 선(禪)과 교(敎)를 두루 수행하여 깊은 선지(禪旨)와 해박한 교학(敎學)을 펼친 선지식이다. 스님은 청정수행 가풍을 올곧게 지녀 평생 수행정신을 흩트리지 않았으며 당신의 수행력을 바탕으로 널리 부처님 법을 알리는데 일생을 바쳤다.

항상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후학들을 이끈 스님은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종단의 정화불사 이후 수행가풍의 진작을 위해 천축사에서 이루어진 무문관 6년 결사를 원만 회향하여 위법망구(爲法忘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침)의 실현을 보였다. 스님은 종단이 시행한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류코쿠대(龍谷大)에서 불교학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데 힘을 쏟았다. 

스님의 수행정진은 후학에게 큰 본보기가 되고 있다. 예순이 넘은 연령에도 젊은 수좌들과 함께 선방에서 참선수행에 몰두했다. 그런가하면 일흔이 넘어서는 <선문염송> <무문관> <유식론> 등을 강의하고 더 깊은 공부를 서원한 스님들과 3년간 용맹정진, 10여명의 전강(傳講)제자를 길러냈다. 

관응스님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병을 앓지 않았다. 임종 전에도 이틀간 공양을 하지 않았을 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세수 95세로 일생을 마감하면서도 죽음 앞에 의연한 스님의 이런 모습은 후학에게 큰 감명과 일깨움을 남겼다. 스님은 “수행자는 신심이 깊어야 한다. 신심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신심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한다” “수행하는데 선과 교를 나누지 마라. 어느 한 곳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후학들에게 일러주었다. 또한 “수행자는 겸손하고 바른 지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응스님은 1910년 (음력) 6월 보름 경북 상주군 외서면 봉강리에서 아버지 옥천(沃川) 전(全)씨 인엽(寅燁)님과 어머니 정(鄭)씨 천실(千室)님의 둘째로 태어났다. 1929년 상주 남장사에서 탄옹(炭翁)스님을 은사, 혜봉(慧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지수(智首), 법호는 관응(觀應)이다. 

1934년 금강산 유점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마치고 같은 해 유점사 설호(雪湖) 강백으로부터 전강했다. 1936년 서울 선학원에서 일봉(一峰)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거쳐 해외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류코쿠대학에 유학, 1942년 졸업했다. 그 후 스님은 김룡사, 유점사, 직지사, 용주사 강원과 조계사 중앙총림의 강백(講伯)을 역임했다. 1943~1952년 오대산 월정사 안거를 비롯, 해인사 백련암, 고성 옥천사 등지에서 참선 수행했다. 1956년 황악산 직지사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1959년에 조계사 주지 및 중앙포교사로 임명됐다. 

1961년 동국학원 이사, 1963년 용주사 주지, 1965년 대구 능인학원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인 1965년 스님은 서울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에 들어가 원만회향했다. 스님이 무문관 결사에 들 때 세수 56세였다. 6년 결사에 들어가던 날 관응스님은 정진자를 대표한 인사말에서 “위로는 제불보살의 가호가 있고 밖으로 사부대중의 외호가 있으며 아래로 8부신장의 두호함이 있으니 아무런 장애도 없을 것이며 기필코 대도를 성취하고야 말겠다”고 서원했다. 

결사를 마친 후 스님은 기자들과 만난자리에서 “나는 아무 공부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해 듣는 사람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2002년 12월 직지사 중암에서 본지 인터뷰 당시 관응스님(불교신문 자료사진).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로 유명
일흔 넘어 선문염송 유식론 강의
더 깊은 공부위해 제자들과 함께
‘3년 용맹정진’ 후 10명에게 전강

깊은 선지에 해박한 교학 연찬
‘항상 인자하고 온화’…존경 받아

1975년 스님의 세수 66세 때. 김천 청암사 수도암에서 동안거 결제에 참여, 젊은 수좌들과 함께 선방에서 정진했다. 스님은 고령임에도 계곡 찬물에서 당신의 세탁물을 손수 빨았다. 시자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이렇듯 대중과 똑같이 생활하니 이를 본 젊은 수좌들은 불퇴전의 신심을 더욱 높였다. 

1981년 스님은 직지사 주지를 맡았다. 칠순의 노령에도 스님은 후학에게 <선문염송>을 강의하는 열정을 보였다. 아울러 <무문관> <유식론> 등 선과 교에 걸쳐 강설법회를 열었다. 그를 계기로 더 공부하려는 스님들(강원의 중강급 이상)을 대상으로 3년간 가일층 내전 연찬의 기간을 거쳐 10여 명의 전강제자를 배출했다. 

1985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에 추대됐다. 1987년 스님은 “이제는 조용히 물러나야겠다”하고는 폐사(廢舍)된 직지사 중암(中庵)을 복원하여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중앙에 들어가던 해 스님은 종단이 제정한 포교대상 첫 수상자가 됐다. 

1989년 학교법인 보문학원 이사장, 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조계종 원로회의 명예원로, 황악산 직지사 조실에 추대됐다. 1997년 스님 세수 88세 때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봉행한 제1회 한국불교 전통선 중흥 영산대법회에서 법문했다. 

직지사 중암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스님은 2004년 2월28일(음력2월9일) 오후7시 이곳에서 당신의 한 생을 마감했다. 세수 95세. 법랍 75년.  

 임종게 대신 발표된 찬(讚) 

진영에 들어 있는 스님이 직접 쓴 찬(讚).

관응스님(1910~2004)은 생전 제자들의 간청에 응해 설법집 <화엄의 바다>를 펴냈다. 그리고 대학 때 스승 후카우라 세이분(深浦正文)선생의 저술 <유식론해설>을 번역 출간했다. 

스님의 장례는 원로회의장으로 3월3일 직지사 만덕전에서 봉행됐다. 

스님의 열반 11년 후 2015년 음력 2월9일 직지사 중암에 비를 세웠다. 직지사 관응문도회에서 세운 ‘조계종 황악산 직지사 조실 관응당 지수대종사비’는 법정(法頂)스님이 글을 짓고 서예가 박정규(朴正圭)씨가 썼다. 관응스님은 임종게를 남기지 않았다. 장례위원회는 임종게 대신 스님의 진영(眞影)에 쓴 찬문을 공개했다. 찬문은 어떤 인물이나 사물·사건을 기념하고 기리기 위해 지은 글로 찬(讚)이라고도 쓴다. 관응스님 진영의 찬문은 스님의 자작이다. 진영은 김호석 화백이 그렸다. 스님은 1996년 김 화백이 그린 진영에 찬을 썼다. 

“너는 내 그림자 나는 네 참 모습 그러나 나니 네니 하는 것은 모두 참이 아니다. 그럼 어느 것이 참 모습인가. 색칠하고 그림으로 그려 얻을 수 없는 것이 내 본래 모습이니 범부와 성현이 바탕은 같지만 그 작용은 저마다 다르다. 쉿 진흙소가 물위로 걸어간다.” 

이 글은 관응스님의 비에 새겨진 글이다. 찬문 전문(全文)을 다 쓰지 않고 법정스님이 관응스님의 찬문을 요약하여 쓴 글을 비문에 새겨놓았다. 관응스님은 평소 “내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낳지 않는다”고 법문했다. 이것이 바로 임종게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상좌 주지 임명에 쓴소리

사사로운 욕심 없던 스님 

후학들은 스님에 대해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스님’이라 한다. 문중의 스님이나 당신 상좌 중에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절 주지를 맡도록 영향력을 행사할만도 한데 전혀 그러지를 않았다고 한다. 어떤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런 어른에 대해 후학들은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왜 없겠냐만 당신 성정이 그러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때인가 상좌 한 사람이 주지를 맡았다는 말을 들은 스님은 “왜 그런 사람에게 주지를 주었나. 주지 노릇 제대로 하겠나”하고 되레 걱정했다고 한다. 문중을 따지고 권속을 챙겨가며 제 식구 내세우기에 나서는 풍토를 우려하는 생각 있는 스님들은 관응 큰스님의 이러한 모습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고 한다.

관응스님의 사형사제 간 우의를 부러워하고 칭송하는 스님도 많다. 관응스님과 녹원스님은 사형사제 사이다. 녹원스님의 세수가 20년 가까이 아래인데도 관응스님은 사제인 녹원스님을 늘 예로써 대했다고 한다. 녹원스님이 직지사 주지로 당신이 회주로 있을 때 녹원스님은 관응스님을 스승 대하듯 모셨다고 한다. 사형사제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같았다고 한다. 

녹원스님은 어떤 일에 관한 회의의 결과를 사형에게 자상히 알렸고 사중의 이런저런 세세한 일도 소상히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관응스님의 녹원스님 사랑은 주변에서도 부러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서로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런 모습들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기에 후학들은 두 어른을 존경하고 있다.

산중 어른들의 일상 언행에서 어른과 함께 생활하는 후학들은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으며 헤아릴 수 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게 아닐까. 앞서 가신 어른들에게서 후학들은 무한한 가르침과 일깨움을 얻게 된다. 그 소중한 배움을 고이 지니는 것이 후학의 일이라 여겨진다. 

 

도움말 : 도진스님(직지사 중암 회주) 

                 웅산스님(직지사 주지) 

자     료 : 관응대종사 비문, 불교신문 

[불교신문3353호/2017년12월13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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