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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금강경] <46> 제30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②언어는 아무리 명료해도 실체가 아니다
  •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 승인 2017.12.0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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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원리 살펴 체득한 경지인 
깨달음 진여 등은 만질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닦지도 않고 집착만 한다면 큰 병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세계가 아닌 것을 말씀하심이며, 그 표현이 ‘세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라는 것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곧 이것이 한 덩어리로 합한 모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한 덩어리 모양은 곧 모양 아닌 것을 말씀하심이며, 그 표현이 한 덩어리로 합한 모양입니다. 수보리여, 한 덩어리로 합한 모양이라는 것은 곧 이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탐내고 집착하느니라.”

제30분의 후반에서는 깨달음 또는 여래에 대한 완벽한 명제 또는 완벽한 언어가 있기는 한 것인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앞에서 <금강경>의 핵심은 제1분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말씀으로 그 핵심을 가르쳐 주신 것은 제3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다. 제1분에서 참된 부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득이 언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3분의 설명이 나왔고, 제3분에서도 깨닫지 못한 이들을 위해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왔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이들은 오히려 지엽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설명하고자 했던 핵심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 모든 설명을 다 모아 놓으면 설명하고자했던 핵심이 되는 것일까? 팔만대장경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해탈, 깨달음, 부처, 진여 등이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 이해하면 해탈하고 깨달아 부처가 되고 진여의 삶이 되는 것일까? 

분해된 자동차 부품들을 완전히 조립해 놓아도 진정한 의미에서는 자동차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운전을 할 때 비로소 자동차가 된다. 그러나 굴러가는 것만으로 자동차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동차를 살 때 갖가지 기능을 다 살펴보고 시운전도 해 본 후에야 비로소 애써 번 돈을 지불하고 자기의 생활도구로 선택하는 것이다. 

해탈이라는 말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지도 않고, 깨달음이라는 말이 우리를 초월시켜 주지도 않는다. 부처라는 말이 우리를 단번에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진여라는 말이 우리의 삶을 맑고 자유롭게 해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던져 해탈, 깨달음, 부처, 진여로 향하려 하는가? 그만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그 가치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가장 요약한 것이 또한 해탈(解脫), 깨달음, 부처, 진여(眞如)라는 용어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용어가 가리키는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분명한 것이지만, 용어에 대한 뜻풀이로만 접근하는 이들에게는 그 가치가 분명하지가 않다. 불교를 수행의 종교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행의 결과로 체득한 경지가 아니라면 모두 헛소리가 될 것이고, 직접 체득한 이가 그 경지에 대해 타인에게 설명해도 그 순간 들은 이가 스스로 상승을 하거나 또는 이후에라도 체득하지 못한다면 그저 짙은 안개 속에서 멀리 있는 사물을 보듯 할 것이다.

제30분에서 제시한 삼천대천세계와 무수한 먼지의 관계는 연기(緣起)의 원리를 좀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신라 의상조사(義湘祖師)는 <법성게(法性偈)>에서 연기의 이치를 이렇게 요약했다. ‘하나 가운데 모든 것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 있어, 하나는 모든 것과 만나고 모든 것은 곧 하나와 만난다. 한 티끌 그 가운데 우주를 머금었고, 모든 티끌들도 다시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연기의 원리를 살펴 체득한 경지인 깨달음이나 진여 등은 만질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법의 성품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 움쩍 않아 본래로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겼으니, 깨친 지혜 알 바요 달리 알 수가 없는 경계.’

언어는 아무리 명료한 것이라도 실체가 아니다. 닦지도 않으면서 깨달음이나 법신(法身) 등을 마치 객관적인 존재인 것처럼 자꾸만 집착한다면 그것 또한 큰 병이다.

[불교신문3352호/2017년12월9일자] 

송강스님 서울 개화사 주지 삽화 박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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