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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1 (2017).12.17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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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숭유’ 조선왕실, 왜 절을 지었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탁효정 지음/ 은행나무

현직 한국학중앙硏 연구원
조선 왕실불사 상징 ‘원당’
화두로 한국불교사 재조명

실록으로 풀지 못한 의문
사료, 설화 등으로 풀어내
왕실 여인들 ‘불심’도 부각

원당(願堂)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발원하는 집’이다. 누군가의 복을 빌거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부처님 전에 올린 법당 또는 사찰을 의미한다. 원당은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화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면서 수많은 변신을 거듭했다. 그 중에 하나는 유교에서 효사상과의 결합이었다. 효를 중시한 중국인들이 사찰에 부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 바로 원당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올 때부터 궁궐 안팎에 원당이 지어졌다. 신라의 궁궐 안에도 내원당이 있었고, 신라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원당이 바로 감포 앞바다가 보이는 감은사다. 또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 끝에 목이 없는 시신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들 창왕이 피눈물을 흘리며 세운 원당이다.

현재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원당은 그리 많지 않은데, 그 중 하나가 파주 보광사에 남아있다. 보광사에는 ‘어실각(御室閣)’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에 숙빈최 씨 즉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동이’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조가 생모를 위해 세운 것으로 이 건물이 바로 원당이다. 또 화성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새로 중창한 사찰이다. 이 경우에는 용주사 전체가 사도세자의 원당인 셈이다.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조선시대 왕실불사를 재조명한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을 최근 펴냈다. 사진은 조선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 씨의 위패를 모신 파주 보광사 어실각.

이처럼 억불숭유를 내세웠던 조선시대에도 왕이나 왕비들은 자신의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찰을 짓거나, 사찰 안에 건물을 세웠다. 조선의 아버지 태조는 물론 유교의 통치 철학으로 대표되는 세종,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실 사람 대부분이 불교와 인연이 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왕실 불사의 흔적은 왕실불교 사찰, 바로 원당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원당(王室願堂)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탁효정 박사는 최근 펴낸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에서 “시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역사를 통찰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길”이라며 왕 중심의 조선사 뒤에 가려진 왕실 여인들의 정성스러운 불사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그리고 “유교를 앞세운 조선이 왜 불교국가인가”라는 반문에 “우리가 아는 조선사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는 철저히 왕 중심으로 기록된 관찬사료라 이것만으로는 조선의 면면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 책을 통해 실록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퍼즐을 사찬 사료와 설화, 지금도 계속 발굴 중인 사찰의 사지(寺誌)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저자가 불교신문에 지난 2012년부터 이듬해까지 ‘탁효정의 왕실원당 이야기’란 제목으로 연재한 원고를 모아 엮은 이 책은 한낱 투기와 가십의 소재에 불과했던 왕실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옛 사부대중의 자생적 개혁 의지와 지혜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여자가 사람이 아니었던 시대,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적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이 마치 목이 좁은 유리병에서 자란 새를 꺼내는 일 같다”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하면서도 조선 500년 역사를 가능케 했던 것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히고 치성을 올린 왕실 여성들의 불심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원당을 이해한다는 것은 명당을 파악하는 것“이라며 명당을 애타게 찾았던 그 시대의 간절한 기도, 그 욕망과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 ‘팜파탈’ 조귀인과 장옥정, ‘국모’ 명성황후 등 흔히 우리가 친숙한 별명을 붙여 부르는 왕실 사람들과 그 원당에 얽힌 사연들을 보면 그 호칭이 후대의 역사관, 즉 현재의 욕망과 아픔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종의 독재 군주적 측면, ‘무능한 왕’이란 오명을 벗기 시작한 광해군의 콤플렉스, 공포정치를 펼쳤던 세조의 선업(善業) 등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 점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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