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의 ‘효심’ 깃든 당대 최고의 성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 반영
왕실 대작불사 진행과정 보여줘
언뜻보면 닮은 듯하지만 개성 뚜렷 

전국서 활동한 조각승 대거 참여
사찰불사에 효심이 녹아든 사례 

용주사 대웅보전 삼세불상, 1790년, 왼쪽부터 아미타여래, 석가여래, 약사여래.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에 위치한 용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로 효행의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절이다. 조선후기 효심이 깊었던 정조대왕(1752~1800)이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위해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창건했기 때문에 ‘효의 사찰’이란 이름을 얻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정조는 아버지 능침 사찰을 용주사(龍珠寺)로 정했다. 

용주사는 억불숭유 정책을 내세운 조선시대에 오대산 상원사와 함께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찰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아버지 장헌세자의 무덤을 이장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용주사는 짧은 공사기간으로 1790년에 건립되었다. 왕실의 원찰이자 왕의 능침을 관리하고 명복을 비는 재를 지내는 능사(陵寺)의 역할을 수행한 사찰로 전체 조영을 계획해 새롭게 창건한 절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조선의 왕으로서 대표적인 효자를 상징하는 정조대왕이 살았던 18세기의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대대적인 혁신이 요청되던 시기였다.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강력하게 실현시키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펴 나갔는데 정조는 그 명분을 효에서 찾았다. 그는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묘를 경기도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으로 옮기고, 여러 차례 능행(陵行)을 갔으며, <대부모은중경>과 <오륜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효라는 대의명분을 강조하여 보수적인 세력이 왕권 강화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조 자신의 정통성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조는 보경당 사일스님에게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다. 국왕이 발원하여 <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다는 것은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정조는 섣달 그믐과 단오날에 <부모은중경> 게송을 부적 대신 집안에 붙이도록 인쇄해 나누어주게 할 만큼 백성들에게 배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용주사에는 나무, 돌, 금속으로 만든 세 종류의 <부모은중경>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경전은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로 하여금 밑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함을 10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경전의 첫 장면은 부처님께서 전생의 부모의 뼈를 보고 절하는 ‘여래정례(如來頂禮)’로부터 시작된다. 

용주사본 ‘여래정례’ 장면은 제자 18인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석가여래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한 무더기의 뼈를 보고 엎드려 절하는 석가여래의 주변에는 눈부신 광채가 햇살처럼 퍼지고 있다. 서서 목례만으로 예를 나타내던 이전의 석가여래에 비해 완전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합장하고 있는 모습은 파격적이다. 한 무더기의 뼈는 곧 사도세자의 유골이고, 허리를 굽혀 절하는 석가여래는 정조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은 아닐까. 이를 반영하듯 화면 향우측 끝 스님들 사이에 세속 인물이 보이는데 정조로 추정된다.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건립한 정조는 능행 때마다 용주사를 찾았을 것이다. 1790년 용주사를 세운 6년 후인 1795년에 정조는 손수 부처님께 복을 비는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지었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한 조선시대 국왕이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게를 짓고 이를 책으로 간행한 것은 정조가 유일하다. 그는 <기복게>에서 자신을 소자(小子)로 지칭해 게를 지어 바치는 대상이 부처님인지 아버지인지를 모호하게 하였다. 부모님께서 길러주신 은혜가 있으니 부모님을 공양하고 잘 공양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福田)이라고 해, 게를 작성하는 목적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공양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용주사의 중심 불전은 대웅보전으로 불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의 높은 불단에 사바정토의 석가여래,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있는 세 부처님의 명칭은 용주사 창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기록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용주사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1795년, 왼쪽)와 <부모은중경>의 여래정례 장면(1796년, 오른쪽).

조선후기 삼세불 사상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의미를 뜻하는 삼세불 개념에 공간적인 개념이 더해지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아미타신앙과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약사신앙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다. 정조는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뒤로 하고 아버지 장헌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용주사에 삼세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의 삼세불상 위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조각된 닫집이 있고 뒤에는 김홍도가 그렸다는 웅장한 후불도가 있다. 대형의 불상이 사라지는 18세기 후반에 1미터가 넘는 크기로 조성된 용주사 삼세불상은 왕실의 원찰이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용주사 삼세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부처님의 모습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닮은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개성이 뚜렷한 다른 모습이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삼세불상은 대부분 수조각승 한 명의 지휘 아래 여러 보조 조각승들이 동참했기 때문에 유사하게 표현되었던 것과는 다르다. 

세 부처님 모두 유난히 큰 귀, 머리 중앙의 반달형 중간 계주, 머리와 육계를 구분하지 않은 채 육계 위에 원통형의 정상 계주를 표현한 것은 공통점이다. 넓게 열린 가슴 앞에 연꽃잎 형태의 주름, 두 무릎 사이에 펼쳐진 율동감 넘치는 옷주름은, 비슷하면서도 세부 표현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한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여래, 입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간 아미타여래, 근엄한 모습이 강조된 약사여래의 얼굴 표정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감지된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진 이유는 세 불상의 조각승이 서로 달랐던 데서 찾을 수 있다.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삼세상원문(三世像願文)’과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조각승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는데, ‘삼세상원문’에는 불상 제작에 상계(尙戒), 설훈(雪訓), 계초(戒初), 봉현(奉玹) 등 20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본존인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의 계초스님이 담당했고, 아미타여래는 전라도 지리산 피근사의 봉현스님이 조성했고, 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상직(尙植)스님이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세상원문’에는 상계로 기록된 조각승이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상직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인물이 잘못 기재된 예이다. 

석가여래를 조성한 계초스님과 아미타여래를 제작한 봉현스님은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각승 상정(尙淨)을 계승한 유파로 생각된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왕실 주도로 단기간에 완료해야 했던 불사였기 때문에 강원도와 전라도 등 전국에서 활동한 조각승들이 참여하였다.

‘삼세상원문’에 의하면 불상은 8월16일부터 시작해 9월30일에 완성했으며 10월 초에 점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빠른 시일 안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각 지방의 뛰어난 조각승들이 동참했을 것이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세 명의 수조각승이 개성적인 조형 감각으로 각자의 기량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불상이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사찰 불사에서 어떻게 반영되었고, 18~19세기의 불상제작이 줄어든 상황에서 왕실 불사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자료이다. 

[불교신문3351호/2017년12월6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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