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며 
신나게 노래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멈추어 서서는 
“어? 따라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되돌아온 메아리를
메아리가 아닌 어떤 것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니 …
여섯 살 배기에게서 나는
시 쓰는 자세를 배웠다 

최근 바쁜 일상에 지친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세 살도 채 안 된 조카와 영상 전화를 하는 일이다. 먼 거리에 있어 만나지 못하는 아이에게 나는 이틀에 한번 꼴로 전화를 건다. 아이를 전화기 앞에 불러 앉히느라 애를 먹는 것은 아이 엄마인 언니고, 결국 말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것은 나지만 그 잠깐의 기쁨을 위해 더 자주 전화를 건다. 아이가 영상으로나마 눈을 마주쳐 주기만 하면 나는 그 순간만큼은 괴로웠던 모든 감정을 털어내고 기쁨을 맛본다. 말문도 안 트인 아이와의 통화는 어른의 애걸에 가까움에도 말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어째서 아이와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해지는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중 몇 년 전 있었던 첫째 조카와의 일이 생각이 났다. 갓 여섯 살이 되던 봄, 아이 손을 잡고 할머니 산소에 갔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며 여자 아이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멈추어 서서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어? 따라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다 ‘따라하는’ 행동의 주체가 반대편 산에서 되돌아온 메아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건너편 산에서 다시 들리자 누군가 자신을 따라한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아이의 순수한 말로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메아리가 메아리가 아니었다니. 메아리를 메아리가 아닌 어떤 것으로 표현해 낼 수 있었다니. 그날 나는 여섯 살배기 어린 여자아이에게서 중요한 시 쓰기 기본자세를 배웠다. 물론 그것이 시 쓰기를 위한 자세의 전부는 아니지만 시를 쓰기 위해 가져야 할 어떤 중요한 마음 중의 하나임을 깨달았다. 아이의 말 한마디로 인해 내가 얼마나 강한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좋은 시 쓰기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 것이다. 

신선한 영감을 받은 그날 이후 나는 어린 아이의 행동과 말을 유심히 보고 듣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이 밥을 먹을 때 맨 바닥을 식탁처럼 사용하는 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까르르 웃어젖히는 일,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을 읽는 것이 즐거웠다. 

어느 잡지의 취재를 위해 만난 한 노시인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서정주가 시 ‘추천사’에서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라고 노래한 것은 다 우리말을 갓 배우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시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아이들의 꾸밈없고 오히려 철없는 시선이 사물의 빛깔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것이지요. 서정주가 ‘바다’에 관한 관습을 일거에 무너트리고 시 ‘행진곡’에서 “서 있는 바다”라고 한 것도 천진한 아이의 시선을 회복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시인은 마땅히 어린아이의 말씨와 눈높이를 지녀야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만 시를 써야 한다는 의미를 아닐 것이다. 아이가 보는 시선으로 사물과 세상을 보며, 얼마나 자신이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깨우치라는 의미일 것이다. 더 좋은 시,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시를 쓰기를 위해서는 응당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리라.

이후 아이의 그 말은 문득 문득 나를 일깨워 준다. 지금도 무엇을 선입견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조카가 아이로 있는 한, 좀 더 자주 전화를 걸어 그 맑은 시선을 곁에 둘 작정이다. 

[불교신문3346호/2017년11월22일자] 

신효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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