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孤雲(고운, 최치원의 字) ’의 못다 이룬 꿈 솔숲바람 되어 불어오네

산문에서 경내까지 천연송림길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 연출
계곡 합수지점에 세운 가운루와
우화루는 뛰어난 조형미 자랑 

고운사 산문에 들어서서 바라 본 최치원길. 소나무와 아기단풍이 어울린 가을경치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의성 고운사가 많이 변했다. 고운사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조계종 교구본사 중 가장 가난한 절 중의 한 곳이었다. 경상북도에 위치한 교구본사 사찰이지만 영남지역의 든든한 불심(佛心)을 등에 업지 못하고 활성화가 덜 된 사찰로 분류됐었다. 하지만 다 옛날이야기다.

지난5일 찾은 고운사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산문(큰 일주문)에서부터 사찰음식체험관, 노인요양원, 화엄문화템플관, 공양실 등 최근 고운사는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할 교구본사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고운사를 이끌어 온 스님과 대중들의 진정어린 노고가 숨어 있음을 실감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건물이 사라진 건 아니다. 새로운 건물이 조화롭게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고운사는 옛것을 이어 새롭게 변했다. 전각과 당우가 많이 들어서 사격(寺格)은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건 숲이다. 고목은 나이를 더해 멋스러워졌다. 일주문에서 들어오는 길 양쪽에는 오래된 소나무 사이로 아기단풍 나무가 몇 겹 심어져 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천연송림 체험로’가 조성돼 명패를 걸었으나 발길이 뜸해진 탓인지 길은 끊긴 듯 자취가 묘연하다.

고운 최치원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가운루. 계곡이 합수되는 지점에 세운 수작이다.

고운사 숲길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과 관련이 깊다. 681년 의상대사가 고운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높은 구름’을 뜻하는 고운사(高雲寺)로 불렀다. 이후 최치원이 머물며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지은 뒤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로 불렀다. 이런 연유로 고운사 숲길을 ‘최치원길’로 붙여본다. 

산문에 들기 전 고운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이 ‘화엄일승법계도’를 형상화 해 숲으로 조성한 ‘법계도림’을 둘러본다. ‘세계최초’라는 수식어가 들어 있으니 특별한 숲이 틀림없다. 광대무변한 화엄사상의 요지를 210자의 게송으로 압축한 글을 법계도로 만들었다. 54번 꺾인 길을 들어가면 중앙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에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이는 사바세계 그대로가 부처님 세계임을 의미한다. 안내판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담겨 있다.

“막힌 것 같은데 트이고, 트인 것 같은데 막히고, 행복하다 싶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아주 묘한 것이 인생의 길 아닙니까. 멈추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누구를 의식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비우면 길이 열립니다.”

최치원길 중간지점에서 바라본 숲길.

산문에 든다. ‘등운산(騰雲山) 고운사(孤雲寺)’라는 현판이 걸린 산문이 구름 속으로 날아갈 듯 서 있다. 그 너머로 붉은 단풍선혈이 낭자하다. 계곡은 야트막하고 물소리는 조용하다. 뚝뚝 떨어지는 단풍낙엽 소리와 이른 새벽 먹이를 찾는 새들의 부지런한 먹이활동 소리가 조용한 물소리를 압도한다. “투둑 토도도독.” 

비포장된 길은 유순하다. 올곧게 뻗어있지 않고 굽은 소나무 등걸 따라 구부러져 있다. 연지곤지 찍은 새색시가 부끄러워 바알간 얼굴을 가리는 듯하다. 길 양쪽에는 수백 년 된 큰 소나무가 하늘을 벗 삼아 숲을 이뤘다. 오랜 삶에 지친 듯 모로 누운 자태로 보인다. 그 사이사이에 심은지 몇 년 되지 않은 아기단풍이 도열하듯 서 있다. 입구에서 보이는 좌측 계곡에 집중돼 있는 단풍은 노랗게 물들어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는 떨어지기 시작한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 했다. 가을 찬바람에 낙엽을 떨군 나무가 본래의 면목을 드러낸다. <선문염송>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최치원길 내부 수로에서 바라본 모습.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때는 어떠합니까?” 

운문선사가 대답했다. “온몸이 가을바람을 맞게 되지(體露金風).” 

적멸의 아름다움은 극한의 아름다움. 모든 게 사라지기에, 다시 볼 수 없기에 느끼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떨어지는 단풍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마지막에는 앙상한 모습으로 떠나는 이 땅의 어머니들을 생각하게 한다.

길 옆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발원을 담아 돌탑을 쌓았다. 중생들의 염원이 얼마나 많았으면 탑을 쌓을 만큼 돌이 모였을까. 고난에 빠진 중생을 구하고자 성불(成佛)마저 포기한 대원본존 지장보살의 발원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한참을 걸어 올라오면 계곡을 건너는 등운교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고운사 경내가 멀리 일주문과 천왕문이 보이고 좌측에 가운루가 서 있다. 바로 옆에는 우화루다. 30여년 전만해도 가운루, 우화루와 나란히 자리한 극락전이 고운사의 큰법당 역할을 했다. 

산문 아래 위치한 법계도림 전경으로 화엄경 사상을 형상화해 숲길로 만들었다.

고운사의 압권은 가운루(駕雲樓)다. 계곡이 합수되는 지점에 지은 이 전각은 ‘구름을 가득 담은 가마’라는 뜻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가허루(駕虛樓)라 불렀다고 한다. ‘허공을 담은 가마’라는 의미다. 가운루든 가허루든 전각의 이름은 신선이 노니는 세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했던 최치원의 안목이 돋보이는 이름이다. 전각은 ‘가마’의 규모가 아니라 허공이나 구름을 가득담은 거대한 배처럼 보인다. 극락교 앞에 위치한 가운루가 구름속에 서 있을 때는 영락없이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와 같다.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파였던 신라 최고의 지성이었다. 12세 때인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에 과거에 합격했다. 여러 벼슬도 지냈으며 문장가로서 명성도 떨쳤다. 885년 귀국한 고운은 신라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의욕을 보였으나 신라 말 어지러운 정치상황과 신분제라는 견고한 벽에 막혀 좌절하고 만다. 결국 42세 즈음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다 사라져 버렸다. 

시대에 이루지 못한 꿈이 계곡에 흐르는 물거품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최치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외로운 구름이 하늘을 떠돌고 가운루와 우화루를 배로 삼아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오는 동안에도 등운산을 휘감은 구름은 가운루와 우화루를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고 있다. 

[불교신문3347호/2017년11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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