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사랑, 아름다운 회향으로 결실 맺다

아픈 아내를 위해 심기 시작했다는 홍천 은행나무 숲의 모습. 다른 곳에 비해 은행나무 잎이 일찍 떨어졌다.

서울에서 일찍 나섰다. 이전 강원도 출장에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정체구간은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단풍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지난 10월23일 올해 개통한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이른 아침에 내달려 인제IC로 차를 내렸다. 이제부터 내리천을 따라 굽이굽이 40여km 한적한 국도에서 가을산하에 폭 안긴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착한 곳이 홍천 은행나무숲이다.

홍천 은행나무숲은 아픈 아내를 위해 농장 주인이 1985년부터 한그루 한그루 심은 은행나무가 2000여 그루에 이르는 숲이 되었다. 사유지인 관계로 25여 년 동안 오롯한 개인정원으로 머물렀다. 하지만 홍천에 은행나무 숲이 있다는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는 일 년에 노랗게 물드는 10월에 한해 방문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찾아오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로 회향된 것이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훌륭한 관광지를 무료 개방해 준 것에 감사하면 거창한 안내표석을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소유주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름도 따로 없다. 다만 지명을 더 해 ‘홍천 은행나무숲’이라 부른다. 개방되는 한 달 동안은 홍천군에서 관리를 해준다. 

홍천 물걸리사지 전경. 왼쪽으로 3층석탑이, 오른쪽 전각 안에는 이곳에서 출토되어 보물로 지정된 여러 성보가 있다. 주춧돌이나 장대석들은 앞쪽에 나란히 놓여있다. 하나의 절터에서 대형 불상이 4구나 존재했던 것을 보면 상당한 사격을 갖춘 대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착한 은행나무숲은 여럿이 걸을 수 있는 폭에 대략 5m 정도 간격으로 다소 촘촘하게 심어져 있다. 또한 하나의 통로가 아닌, 은행나무 길 옆에 또 다른 은행나무 길들이 놓여 있어 농원의 과실수 식재를 보는 듯 했다. 

이어서 도착한 곳은 같은 홍천군에 있는 물걸리사지. 이 폐사지(강원도 기념물 제47호)의 절 이름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에는 홍양사라고 한다. 1967년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 조각, 수막새와 암막새 기와, 조선시대 백자 조각 등이 발견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찰이 유지 되었을 것이다. 현재 이 폐사지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542호), 불대좌(보물 제543호), 불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3층석탑(보물 제545호) 등 보물 5점이 지키고 있다. 3층석탑을 제외한 나머지 보물들은 1982년 사지 안에 보호전각을 세워 그 안으로 옮겨져 있으며, 주춧돌, 장대석 등의 여러 석재가 한 귀퉁이로 옮겨져 있다.

부부가 함께 지냈을 것으로 여겨지는 아담한 집이 홍천은행나무숲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보호전각 가장 왼편에 있는석조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의 부처님은 사라졌지만, 광배와 대좌는 온전한 사태로 남아 있다. 광배 중앙의 물병과 활짝 핀 해바라기 한 송이 같은 조각은 몸의 빛을 나타내는 신광(身光)과 상호의 빛을 나타내는 두광(頭光)을 나타낸다. 이 외에도 넝쿨무늬와 불꽃무늬가 광배에 가득하며, 9곳에 작은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마모가 많이 일어났음에도 묻히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대좌는 물걸리에 남아 있는 다른 대좌와 마찬가지로 팔각형을 기본으로 하며, 상대에는 꽃잎의 끝이 위로 향한 연꽃이, 중대에는 다양한 모습의 부처님이, 하대에는 팔각의 모서리마다 귀꽃이 조각되어 있어 화려하다. 조성 시기는 다른 물걸리 대좌들과 동일하게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2003년에는 추가 발굴조사 결과 발표가 있었다. 금당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남향 전각이었으며 금당에는 본존으로 비로자나불이 위치해 있었으며 그 좌우에 석가여래와 노사나불, 혹은 아미타불이 자리했음을 확인 했으며, 이전 조사에서 소량의 철불 조각이 수습된 것을 감안할 때 우협시는 철불 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폐사지는 수많은 지정문화재가 쏟아져 나왔음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보호전각의 열린 문으로 대좌에 자리 잡은 비로자나불이 흐릿하게 보여, 법당의 느낌을 준다.

폐사지에는 먹먹하게 다가오는 넓은 여백이 있다. 창건 당시 짓은 전각부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해진 부도탑 여기에 또 다른 필요에 의해 더해진 다른 전각들까지, 지그시 눈을 감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촘촘한 전각들이 가람을 일궤 그 여백을 채운다.

그렇다면 창건 당시 모아졌던 수많은 정성은 한낮 한줌의 재가 되어 흩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창건이후 폐사 될 때까지 불자들의 신심을 북돋았을 것이면 환희심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지금도 보호각 안에는 누군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는 흔적이 곳곳에 있다. 

보호전각 안의 모습. 왼쪽으로부터 보물 제544호 석조대좌 및 광배, 보물 제54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 석조대좌.

은행나무의 꽃말은 ‘장수’다. 아픈 아내를 돌보면 좀 더 오래 함께하고자 했던 농장 주인의 지극한 정성을 떠올리게 하는 다정한 부부들의 모습을  지금도 홍천 은행나무숲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 개인의 지극한 정성이 아름다운 회향으로 더욱 빛을 바라고 있었다. 

대좌 중대 조각들은 섬세하면서 아름답다.

[불교신문3345호/2017년11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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