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언어로 불교 재해석하는 작업 필요


강형철  한국불교학회는 12월2일부터 3일까지 동국대에서 ‘불교와 4차산업’이란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4차산업 사회에서 불교 의미를 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앞두고 좌담회를 열게 됐다. 4차산업에 현대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황종성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전에는 물리적 공간에만 살았지만, 이제는 컴퓨터와 사이버 공간이 합쳐지는 시대이다. 사회관계까지 다 바꾼다. 생존하려면 4차산업 혁명에 대응해야 한다. 

김성철  4·19와 같은 혁명은 시점이 있지만 4차 산업혁명은 특정한 시점이 없다. 저울대가 기울듯이 서서히 무르익다가 힘의 중심이 바뀌는 시기가 됐기에 4차산업 혁명이라는 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인간이 기술을 주도했지만 지금은 인간이 기계에 의존하고 순응한다. 이런 주객전도의 흐름에서 인간이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면 4차산업 기술을 잘 파악하여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인간은 기계의 명령만 따르는 좀비와 같이 살게 될 것이다.

보일스님

자본의 욕망 증식 우려
자비로 귀착할지 ‘주목’ 
고전 종교관 답습 ‘위험’

보일스님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고통이냐 행복이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혁명에 가까운 변화가 오고 있다. 이 변화가 고통으로 귀결되는 ‘디스토피아’가 될지 행복으로 가는 ‘테크노피아’가 펼쳐 질지 두려움과 희망이 뒤섞여 있는 시점이다. 이런 변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고통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기술혁신의 혜택을 균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강형철  1, 2, 3차 산업혁명은 지나고 보니 혁명이었다는 역사적 정리에 가깝다. 4차 산업 혁명은 오기 전부터 혁명이라고 한다. 역설적으로 그 점이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이다. 이미 변화의 물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일부 엘리트만 주도하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생활에서 체감하게 될 상황이기에 직업이나 전공분야에 관계없이 누구나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성철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사람이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됐다. 말하자면 게으르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불교의 삼계설에도 이런 인간의 희망이 반영되어 있다. 삼계 가운데 욕계의 정상인 육욕천(六欲天) 가운데 화락천(化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다. 화락천은 마술사 같이 내가 직접 원하는 쾌락을 만들어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보다 위에 있는 타화자재천에서는 나는 가만히 있고 남이 만들어 준 쾌락을 즐긴다고 한다. 이런 욕계(欲界)를 넘어서 색계(色界)로 가면 몸이 빛으로 변하고 감각이나 인식을 먹고 산다고 한다. 색계를 넘어서 무색계(無色界)에 오르면 번거로운 몸뚱이도 사라지고 삼매(三昧) 속에서 살아간다. 위로 올라갈수록 육체를 움직이는 노고가 점점 적어지는 것이다. 삼계설에서 가르치는 상상에는 인간의 희망이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4차산업 혁명의 큰 방향은 불교의 삼계설에서 가르치는 ‘게으름’의 방향이다. 4차산업 혁명은 무한 입력, 무한 처리, 무한 출력의 특징을 갖고 있다. 컴퓨터를 예로 들면 예전에는 키보드나 마우스로 입력하고, 프린터나 모니터로 출력했다. 
하지만 4차산업에서는 입출력 방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다. 관세음보살을 천수천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안(千眼)으로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의 정보를 파악하고, 천수(千手)의 행동으로 그런 중생을 돕는 방식은 무한입력, 무한출력의 4차산업과 방식이 다르지 않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심을 갖춘 분이다. 그러나 이렇게 손이 천개이고 눈이 천개라고 하더라도 그 중심에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악인(惡人)이 들어앉아 있을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천수천안을 닮은 4차 산업은 가치중립적 기술로 선악(善惡)과 무관하다. 그런데 누군가 기술을 독점해 그 중심에 빅브라더와 같이 들어앉을 경우 우리 모두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4차산업 기술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도록, 그 혜택이 모든 사람,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게 돌아가도록 항상 감시하고 살펴야 한다. 

김성철 교수

가상현실 윤리 정립 필요
시대 맞는 계율 만들어야
근본적인 해결책은 ‘수행’

황종성  우리가 맞이하는 세계를 불교에서 미리 그리고 있어 놀랐다. 예전에는 개인적으로 능력이 되는 사람만 정신적, 인지적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어 차이가 없다. 인공지능이 생각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마음’이 없다. 인간들이 육체적 어려움, 나아가 생각하는 고단함이 없어지는 시대가 됐지만, 인공지능이 마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한다. 마음에서 느끼는 것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할 역할이다. 

보일스님  종전에는 아무리 기술혁신이 된다 해도 마음은 인간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기술발전의 수준과 방향을 보면 그러한 이해도 머지않아 흔들릴 것 같다. ‘인공지능’과 더불어 ‘인공감정’에 대한 개발도 속도를 내고 있으며 머지않아 마음이라는 영역에 대한 과학적 연구도 비약적 성취가 예상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을 기술적으로 모방할 수 있을지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 방향에 대한 관심과 제어가 더욱 중요할 수 있다. 기술의 혁신과 발전도 중요하지만 개발자나 연구자들의 자본이나 욕망의 증장(增長), 증식(增殖)에 방향성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방향성 자체가 고통의 종식, 특히 자비(慈悲)로 귀착될 수 있는지는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강형철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긍정적 입장과 부정적 반응이 있다. SF(공상과학)는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를 더 많이 다룬다. 모두가 동경하는 유토피아를 구상하는 것보다 모두가 혐오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것이 더 손쉽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부정적 영향을 이야기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인공지능(AI)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다양한 방식의 두려움이 있다. 

황종성 교수

우리가 맞이하는 ‘세계’
불교 그리고 있어 놀라
AI가 마음은 해결 못해

황종성  4차산업 혁명이 종교로서 불교뿐 아니라, 정신 수양의 불교로 뜻을 펼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사람들은 그동안 마음에 관심을 갖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는 자기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균형과 조화가 필요한데 생각하는 능력은 커졌다. 그것에 맞춰 마음의 크기도 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산업화 시대에 갑자기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지만 문화적 정신적으로 따라가지 못해 어려움을 겪은 것과 같다. 마음을 잘못 먹으면 기술을 갖고 큰일을 내는 흑심도 생길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다른 종교나 힐링매커니즘이 있겠지만 불교의 역할이 요구된다. 적극적으로 가치를 제공하면 불교를 통해 마음을 키우고 안식을 찾으려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강형철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은 불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했으면 한다.

김성철  불교 교리 핵심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로 정리된다. 괴로움은 모든 생명이 느낀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생명들은 괴롭고 힘들 때 낙(樂)으로 해결한다. 4차산업에서 고(苦)를 제거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몸을 쓰기 힘들면 로봇을 만들고, 무언가가 파악이 안 되면 통신망을 이용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해서는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셨다. 4차산업의 낙 속에 살더라도 결국 나중에는 죽음이 닥치는데, 그 순간 엄청난 고통이 온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고의 궁극적 해결은 낙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마음속에 있는 집(集, 욕심, 분노, 교만심, 어리석음 같은 번뇌)의 뿌리를 뽑을 때 고는 사라진다.

보일스님  불교는 인간 의식의 흐름과 마음의 구조에 대해서 집요할 정도로 오랜 시간 천착해온 전통이 있다. 그것은 아비달마와 유식으로 자리매김했고, 불교의 지적 전통은 인공지능기술 개발 과정에 있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공지능기술은 단지 기술과 공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에 대한 이해로부터 의미 있는 통찰과 영감을 과학과 산업계에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단지 오래된 종교 전통이 아니라 그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의식에 대한 부단한 관심과 연구 그 체계화에 전력을 기울여왔다. 그러한 오랜 전통이 인공지능기술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비로소 시절인연을 만났다.

황종성  불교가 마음을 키우고 훈련시키는 방법을 알려 줘야 한다. 육체적으로 편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한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각하는 능력이나 정신적 부담은 줄었지만, ‘마음의 운동’을 하지 않으면 4차 산업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일반인들은 마음의 번뇌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운동을 해서 건강을 챙기듯 4차 산업시대에 현대인들이 수양(修養)하도록 권해야 한다. 

보일스님  학술대회에 발표할 논문을 쓰면서 선문답(禪問答)과 알고리즘(Algorithm)이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첫 번째는 단순성이다. 선문답은 일체의 번다한 허례를 제거하여 그 응축된 에너지를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를 깨닫는 것에 집중시키는 방식이다. 알고리즘도 또한 복잡성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단순함을 추구한다. 두 번째는 목표 지향성이다. 선문답은 궁극적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해법이며, 알고리즘도 특정문제의 해결이나 절차를 구축해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최적화이다. 응병여약(應病與藥)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한다는 것이다. 
선문답이 판에 박힌 형태의 대화가 아니라 제자의 근기에 따라 문답을 달리하듯 알고리즘도 주어진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최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불교전통과 과학이나 공학사이에 있어서, 세상을 인식하고 그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의 체계적인 유사성이 매우 인상적이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가져온 불교는 시대정신을 읽어가면서 진화해 왔다. 세상과 소통하고 욕망이 변하는 방식에 응병여약 해왔다고 할 수 있다. 4차산업 시대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불교가 4차산업 시대에 고전적인 종교관을 답습하고 고집한다면 거대한 변화의 급류 속에 사라질 위험이 있다. 

김성철  4차산업으로 인하여 세상은 극락과 같이 행복한 곳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의 극락(極樂)은 놀고먹는 곳이 아니다. 극락은 성불하기 위해 불교 공부하러 가는 곳이다. 극락에 가려면 선행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불교 수행하여 성불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다.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극락은 지옥과 같이 변한다. 4차산업 혁명도 마찬가지다. 수행하겠다는 마음, 나와 남의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알맹이가 빠지면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곧 지옥과 같이 변한다. 상대적 행복은 반드시 고통으로 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장 편한 포즈로 잠을 자도 30분만 지나면 몸이 배겨서 아프다. 또다시 안락한 자세로 바꾸지만 30분이 지나면 다시 뒤척인다. 그 이유는 낙(樂)은 항상 고(苦)로 변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 시대는 즐거움이 가득하고 지금의 문명보다 뛰어나지만 그런 상대적인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다. 열반과 수행의 길을 잊지 않도록 해야 4차산업 시대에 외적, 내적 행복이 결합되는 진짜 극락 같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

강영철 박사

엘리트만 주도해선 안돼
생활에서 체감할 ‘현실’
국제학술대회는 ‘이정표’

강형철  그런 점에서 4차산업 혁명시대에도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진리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아는 변하는 게 없는데, 무상은 설명 방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 무상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생활에서 시간에 대한 체감은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이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새로운 고민이 있어야 한다.

김성철  부처님은 인간계(人間界)에서만 나온다고 한다. 지옥, 축생은 너무나 괴로워서 공부할 시간이 없고, 천상계에서는 행복에 취해서 공부할 마음을 안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苦)와 락(樂)이 섞여 있는 인간계에서만 부처님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4차산업 혁명으로 인해 인간계가 천상계와 같이 변해간다. 불교만이 아니라 종교 자체에 관심을 갖기는 쉽지 않은 세상이 된다. 마음이 바깥으로 쏠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환기시켜줄 필요가 있다. 또 갖가지 약품과 육식 문화는 수많은 동물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다. 인간이 누리는 4차산업 혁명의 행복은 다른 동물의 희생을 딛고 얻어진 행복이다. 다른 생명에 대해 항상 배려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4차산업이 이룩한 행복은 사실 맹목(盲目)한 것이고 다른 생명의 엄청난 비극을 딛고 누리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황종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새로운 세계를 불교가 안내해주면 좋겠다. 르네상스 시대 서양에서는 신(神)의 권위가 무너졌다. 합리적 사고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결국 지금의 산업화 사회를 만들었다. 이제 합리적 사고의 시대는 저물고 마음으로 세계를 받아들이는 단계가 됐다. 서양에서는 지금의 기술을 설명하거나 받아들이는 이론 체계나 도구가 없어 곤혹스러워 한다. 불교가 그런 부분을 설명해주고, 국민들이 납득한다면 국가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강형철  4차 산업 기술을 불교와 연관해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실질적으로 인용 가능한 학술적 자료가 부족한 현실이다. 이미 세간에 담론이 형성되어 있는 이상은 학계의 해석이 필요하고,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 다양한 연구결과가 선보이면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의 목표는 4차산업과 관련하여 완결된 정답을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 있다.

보일스님  10년 전에 ‘인공지능로봇에 대한 불성 연구’라는 논문을 썼다. 그때만 해도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 논의였다. 불교적 관점에서 ‘인공지능에 불성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정도의 두루뭉술한 차원의 논의였다.이번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주제는 ‘인공지능 챗봇과 선문답의 알고리즘 데이터’ 인데, 이번에 이 논문을 작성하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간 인공지능기술이 비약적으로 성장을 가져왔고 이미 실용화되고 있으며 전문화된 형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심리치료를 담당하는 챗봇(chatterbot)의 개발, 그 중에서도 시리아 난민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상담치료하는 ‘카림(karim)’을 비롯해 이들의 정착 활동을 돕는 무료 법률챗봇인 ‘두낫페이(DoNotPay)’, 24시간 자살 예방 상담 챗봇인 ‘크라이시스 텍스트 라인(CTL, Crisis Text Line)’ 등이 상용화되어 있다. 이처럼 이미 세상은 인간고통의 문제에 대해 불교계에서의 담론제시보다 앞서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첨단기술과 자비행의 조화를 모색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번 학술대회가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황종성  4차 산업혁명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번 국제학술대회에 거는 기대가 굉장히 크다. 목말라 하는 것을 채워 주는 의미가 있다. 주제나 문제의식을 개발하는 후속 활동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지난 5일 불교신문 사장실에서 ‘불교와 4차산업’이란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강형철 한국불교학회 총무이사, 해인사 승가대 학감 보일스님, 김성철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장, 황종성 한국정보화진흥원 연구위원.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김성철  응용불교학의 한 영역이 열렸다. 4차산업 혁명은 현실이다. 불교의 특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항상 그 시대 문화에 순응해 새롭게 창출된다는 점이다.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올 때 노장(老莊)의 언어로 재해석 된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부른다. 격의불교에는 일부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불교가 도입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강하다. 4차산업 혁명 시대를 맞아 과학기술의 언어로 불교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 시대의 격의불교다. 한국불교학회는 전반기에 4차산업의 국내 최고 전문가들을 초청해 다섯 차례 워크숍을 열었다. 앞으로 어떤 전문가가 보아도 손색없는 논문들이 발표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불교와 4차산업 관련 연구의 끝이 아니고 시작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불교가 미래의 종교가 될 것이고, 과학과 가장 잘 어울리는 우주종교라고 평한 바 있다. 아인슈타인의 통찰이 암시하듯이 불교는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강형철  국제학술대회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잘 되기를 바란다. 이번 국제학술대회에서 훨씬 구체적인 제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발표된 논문을 모아 내년에 출판해 논의의 중심이 되게 할 계획이다. 좌담회에 참석해주어 감사 드린다. 

[불교신문3345호/2017년11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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